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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론 60] 성화의 조달자(2) 본문

성화론 (Sanctification)

[성화론 60] 성화의 조달자(2)

En Hakkore 2024. 3. 27. 10:55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에서 '성화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은 답을 말하고 있다:

'성화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서 창세 전에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은 자들은 때가 되어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적용받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전인적으로 새롭게 함을 받게 된다.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씨앗들과 모든 구원의 은혜들이 그들의 마음속에 부어진다. 그 같은 은혜들은 감화 감동을 일으키고 증가되며 강화되어 그들은 더욱 더 죄에 대하여는 죽게 되고 생명의 새로운 은혜로 나아가 살게 한다.'

우리는 대요리문답서가 작성한 그 같은 탁월하고도 유용한 교훈을 비판할 만한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가르침으로 수천 수만의 그의 백성들에게 큰 복을 내리셨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신발 끈 풀기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존재들과 맞서 거친 논쟁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날 그 모든 가르침들을 집대성한 것들을 확신할 수 있다. 그들이야말로 가르침에 어떤 과오도 없는 자들로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최후의 사람들로 확신한다든지 또는 우리는 성경의 경계점에 도달한 이러한 가르침에 반하여 어떤 반대의견도 내세울 수 없다고 믿는 것이 아니다.

최상의 사람들도 고작 인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누구에게도 대부(代父, Father)라고 불러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종들을 위한 깊은 존경심과 그들의 영적 학식으로 인한 높은 평가가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살전 5:21)는 말씀으로부터 우리를 단념케 하는 것이 되면 아니 된다.

베뢰아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까지도 시험해 보라는 명령을 받았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이러한 정신으로 우리도 앞에서 인용한 것에 대하여 두 가지 문제점들을(observations)제시해보고자 한다.

첫째로 웨스트민스터 총대들이 정한 성화에 대한 정의나 묘사는 모두 불충분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자들의 성화에 있어서 전적으로 가장 중요한 측면과 근본적인 요소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우리의 성화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도 없다(히 10:10, 13:12).♡

성화를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으로 한정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 성화는 성자에 의해서 이루어진 거룩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이것은 진짜 심각한 손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그림을 낳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의 한 사람에게 혹은 사람들의 모임에 그의 모든 말씀의 빛을 수여해주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다.

'성화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온전하고도 더 나은 답변은 성화란 첫째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따로 세움을 입어 거룩한 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행동이다. 둘째는 그것은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가지고 있는 완전한 거룩이며 그리스도의 깨끗케 하시는 피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교회가 가진 탁월한 순결함이다.

셋째는 성화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로서 일깨우는 작용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을 죄로 인하여 죽은 자들로부터 구별하여 세우고 그들에게 거룩한 삶 혹은 특성 등을 제공해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요리문답의 정의는 결함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중간부터 시작한 것이지 처음부터 다룬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화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에게 제공한 완전하고도 온전한 것으로 먼저 다루지 않고 성령의 불완전하고 점진적인 사역을 접하게 한 것이다.

신자로 하여금 죄로 인하여 실패한 자신을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돌이켜 완전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골 2:10).💕  그러나 요리문답은 옛 창조의 더러움과 찌꺼기 가운데서 새 창조의 정금을 찾는 헛된 일을 종종 저지르게 하는 내적 성찰을 하도록 격려할 뿐이다.

그것은 신자로 하여금 그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드림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온전하게 되었다는 놀랍고도 즐거운 확신을 알지 못한 채로 떠나게 하는 것이다(히 10:14). 만일 신자가 그 사실을 갖지 못한다면 의혹과 두려움이 계속 그를 괴롭힐 것이며 믿음의 온전한 확신이 그로 인하여 수반되는 모든 싸움을 회피하게 만든다.

둘째로 요리문답의 정의에 대해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그 표현문구가 잘못되었고 오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초신자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더욱 더욱 죽고 새 생명에 살아난다는 것을 확신하게 한다고 하자. 그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신자가 믿음의 여정을 걸어갈 때 마귀는 그를 더욱 더 무섭게 공격한다. 육과 영의 내적 갈등은 도리어 더욱 좌절케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빛은 자신의 죄로 인한 실패만 더더욱 부각시키게 될 것이다. 오호라, 나는 악하도다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외침만 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신자가 도달할 결론이 무엇이겠는가? 이게 무슨 일인지? 만일 요리문답의 정의가 옳다면 '나는 슬프게도 잘못 이끌림 받았구나, 나는 결코 만족스럽지 못하였도다!' 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더욱 죄에 대하여 죽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그의 경험이 인정할 것이다. 그는 죄가 내 속에서 더 기승을 부리고 과거 10년 전보다 지금 죄에 대하여 더욱 살아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Arthur W. Pink 성화론 p159

■ 히브리서 10:4,5,10,1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