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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82] 아브라함과 하갈 본문

강해시리즈/창세기 강해 (Gleanings In Genesis)

[창세기 강해 82] 아브라함과 하갈

En Hakkore 2024. 3. 18. 11:00

사래의 잘못된 제안은 아브람의 믿음의 인내를 시험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라고 말씀하셨다(창 12:2). 또 하나님음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15:5).

그러나 처음 약속을 받은 후 10년이 지났을 때에도 여전히 그에게는 단 한 명의 자녀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여호와를 믿었다"(15:6). 그리고 그는 지금 그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리기보다, 차라리 자신의 손과 인간적인 경험을 사용하여 스스로 그것을 이루기를 더 좋아한다.

그것은 야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장자의 명분은 에서가 아니라 그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 자신의 계략으로 그것을 얻고자 했다.

그것은 모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자손들이 이방의 객이 되어 400년 동안 괴롭힘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한 애굽인이 어떤 히브리인을 때리는 것을 보고 모세가 나섰을 때는 그로부터 단지 360년이 지난 때일 뿐이었다. 그때 모세는 그 일을 자신이 떠맡으면서 그 애굽인을 쳐죽였다.

우리의 길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과 그를 계속적으로 신뢰하면서 그가 이루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별개이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16:2).

우리의 인류의 조상은 아내의 말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범죄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의 조상 역시 여기에서 아담의 범죄를 따른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경계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가족인 것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 영적 생활을 훼방하는 올무와 장애물이 되는 것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훈계를 항상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고후 6:14).♡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16:3).

갈라디아서 4:22-26은 여기의 행동과 그에 대한 아브람의 반응 안에 내포된 교리적 원리들에 대한 영감(靈感)된 주석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브람의 타락의 시대적 의미에 대해 충분히 설명했으므로 여기에서 그것을 다시금 정확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때를 기다리는 대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애굽 여자를 취함으로써 도리어 문제를 일으키고 말았다. 이것은 오늘날의 신자들 사이에서도 얼마나 자주 반복되는 일인가! 그것은 마치 성령으로 시작한 일을 육체로써 완성시키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브람이 아내로부터 그럴듯한 유혹에 굴복한 결과는 즉시 나타났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4절). 그 결과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애굽인 여종은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신분에 우쭐거리는 마음이 생겼다. 그녀가 볼 때 사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사래는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며 남편에게 불평을 한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은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에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5절).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이와 같이 자신이 잘못한 일을 남의 탓으로 돌리며 비난하기를 좋아한다. 자신에게 닥친 "불행"에 대해 사람들은 너무나 자신의 책임은 뒤로 감춘 채 하나님이나 혹은 사탄을 비난한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6 상반절).

아브람은 사래의 잘못의 책임을 자신이 취하기를 거절하면서 그녀로 하여금 자기가 뿌린 것의 열매를 스스로 취하도록 내버려둔다. 여기에서 하나의 악이 어떻게 또 다른 악을 이끄는지 주목하라. 그렇게 하는 가운데 아브람은 가정의 머리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아내에게 양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6 상반절).

솔로몬은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라고 말했다(잠 21:19). 이러한 말은 아브람에게도 해당되는가? 하갈 역시도 잘못을 행한 자의 길이 험하다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계속해서 7절을 주목해 보라.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이것은 얼마나 큰 은혜인가! 여기에서 처음으로 언급되는 "여호와의 사자"가 하나님 자신의 현현(顯現)이라는 사실은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여호와의 사자가 여기의 가련한 애굽인 여종을 만난 장소를 주목해 보라.

그곳은 "광야의 물 근원 곁"이었다(by afountain of water in the wilderness, 한글개역개정판에는 "광야의 샘물 곁" 이러고 되어 있음). 또 그곳은 14절에서 "샘"(well)으로 일컬어진다. 바로 여기가 성경에서 "샘"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타나는 장소이다.

여기에서 잠깐 멈추고 구약에서 "샘"이 언급되는 다른 몇 개의 구절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것은 그러한 구절들에 나타나는 "샘"이 너무나 아름답게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는 자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요 4:14).

"샘"이 언급되는 구약의 다른 구절들로 가기에 앞서, 먼저 우리는 그 단어가 여기(창세기 16장)에서 어떻게 말하여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샘과 관련하여 우리는 세 가지를 주목할 수 있다.

첫째로, 그것은 "광야" 에 있었다. 둘째로, 그것은 "물 근원 곁"에 있었다. 셋째로, 바로 이 샘에서 하나님이 하갈에게 스스로를 나타내셨다.

여기의 상징들을 해석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스도가 발견되는 곳은 세상의 화려하며 시끌벅적한 곳이 아니다. 구주를 만나는 것은 사람이 일시적인 "죄의 낙"을 누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곳은 광야이다. 다시 말해서 죄인이 구주를 만나는 것은 우리가 세상의 현란한 것들로부터 물러나 "광야"에 있을 때이다. 💕

가련한 인생이 구주를 발견하는 곳은 어디인가? 그곳은 다름 아닌 기록된 말씀을 상징하는 "물 근원"이다. 가련한 죄인들이여! 진지한 마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자 하는가? 사람들로부터 물러나 그에 대해 증언하는 성경을 찾으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스스로를 나타내신 곳 역시 바로 이 "샘"이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13, 14절).

여기의 "샘"이 상징하는 그리스도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4:9). 하나님이 스스로를 충분하게 나타내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

Arthur W. Pink 창세기 강해 p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