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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59] 노아의 타락과 노아의 예언 본문
2. 노아의 예언의 의미.
그의 예언은 저주와 축복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아들들에 대한 그의 예언은 그가 술에 취했을 때 행한 그들의 행동과 연결된다. 노아의 타락은 심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함이 아버지의 슬픈 장면을 발견하고 그것을 악의적으로 즐거워하면서 형제들에게 떠벌인 것은 더 큰 죄였다.
죄를 조롱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미련한 자는 죄를 조롱하여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잠 14:9, 한글개역개정판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라고 되어 있음). 아이가 자기 부모의 죄를 드러내며 조롱하는 것은 가장 나쁜 종류의 악이며, 그 마음이 완전하게 부패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가나안에게 선언된 저주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죗값이 아들에게로 유전되는 것에 대한 한 가지 실례(實例)를 발견한다. 모든 것이 의심받고 도전받는 오늘날의 교만한 시대에, 사람들은 이와 같이 죗값이 유전되는 것의 도덕적 정당성을 비판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매우 무자비하며 부당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겸손한 신자는 자신이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심오한 것들에 대해 과도하게 캐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와 같은 법칙을 세우셨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옳음을 안다. 자신이 그것의 옳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든 없든 상관없이 말이다.
함의 죄는 아버지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과 관련한다. 그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다. 그가 정말로 아버지를 걱정했다면, 그는 다른 형제들처럼 행동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대신 그는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완전한 무례를 드러냈다.
그러한 함의 악한 행동의 두려운 결과를 주목해 보라. 그는 정확하게 자신이 뿌린 것을 거두었다. 함은 아들로서 죄를 범했으며, 자기 아들 안에서 형벌을 받았다. 함에게 부과된 형벌은 그의 아들이 다른 형제들의 종이 되고, 그의 자손들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25절). 여기에서 "종들의 종" 이라는 표현은 가장 비천한 일을 하는 노예를 함축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노아가 선언한 "저주"가 함에게 직접적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 즉 넷째 아들 "가나안"에게 떨어진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10:6). 뒤에 보게 될 것처럼, 이러한 저주는 단지 가나안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함의 자손 모두를 포괄했다.
아마도 여기에서 "가나안"이 여러 형제들 가운데 특별하게 선택된 것은 훗날 약속의 땅에 올라가 그 땅을 점령하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을 특별하게 고무하기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와 같이 성령은 모세에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아가고 있는 땅의 주민들 즉 가나안 족속들에게 특별한 저주가 내려져 있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실상 함의 모든 아들들이 이러한 저주의 범위에 포함되는 것은 다른 형제들의 경우와는 달리 함에게 어떤 축복도 전혀 선언되지 않은 사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9:26).
셈의 상급은 특별히 종교적인 특권과 관련된다. 여기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호칭을 주목해 보라. 다음 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라는 표현을 읽는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셈의 하나님 여호와" 라고 표현된다. 이것은 언약관계를 나타내는 호칭이다. 💕
하나님은 셈의 자손들과 언약관계를 맺으실 것이었다. 여호와가 셈의 하나님이 되실 것을 깨닫는 순간, 노아는 감사의 탄성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27절).
야벳이라는 단어는 "창대함" 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일종의 "말놀이"(wordplay)이다.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and he shall dwell in the tents of Shem). 이것은 매우 모호한 표현이다. 선행사가 무엇인지 확정하기가 상당히 어렵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셈의 장막에 거하는" "he"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인지 혹은 야벳을 가리키는 것인지 서로 의견이 나뉜다. 비록 이후의 역사(歷史)가 두 해석 모두를 정당화시킨다고 하더라도, 나 개인적으로는 후자의 해석을 선호한다.
혹시 성령께서 둘 모두를 사실임을 나타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것을 불확실한 상태로 그냥 내버려두신 것은 아닐까? 어쨋든 하나님이 셈의 장막에 거하신 것도 분명한 사실이고, 야벳의 자손들이 지금 셈의 장막에 거하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Arthur W. Pink 창세기 강해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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