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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fe of David 238] 시므이의 저주(사무엘하 16장) 본문
징계에 대한 순응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이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 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삼하 16:9-10).
여기에서 다시 예표가 대형 속으로 통합된다. 그것도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첫째, 다윗의 헌신적인 추종자들 중 한 사람에게서 나온 그 제안은-그것은 의도는 좋으나 매우 인간적인 것이었다-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과 관련해 주님께 "주여, 우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라고 하여 마치 엘리야가 한 것처럼 그들을 살라버리기를 원하시나이까"(눅 9:54, KJV-역주)하고 묻는 장면을 상기시킨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아직 너희가 어떤 영을 지녔는지 알지 못하고 있도다"(55절, KJV-역주)라고 대답하셨듯이, 다윗 역시 아비새를 만류했다. 이것은 그가 시므이가 말하는 것처럼 "피를 흘린 자"(삼하 16:8)가 아님을 보여 주는 분명한 증거였다.
둘째, 다윗은 욕설을 욕설로 되갚기를 거부했다. 이것은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을 남기시면서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기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던"(벧전 2:23) 주님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를 탐구하는 데서 돌아서서 본문의 실제적 교훈을 살펴보자.
다윗은 비록 사울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었으나 우리아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의로운 징계에 순응했고 시므이를 용서했다. 압살롬과 시므이는 모두-비록 그들의 행위 자체는 그들의 것이었을지라도 다윗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도구들이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아론에게서 나타난다. 그는 자기 아들들의 죽음이라는 무서운 시련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자신의 큰 악을 기억했다(레 10:1-3). 그리고 그는 자신이 그보다 더 심한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알고 잠잠했다.
"왕이 이르되 스루아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삼하 16:10).
다윗은 이 경험 속에서 자신이 밧세바와 우리아에게 저지른 죄로 인해 자신을 벌하시는 하나님의 손길를 보았다.🥺 시므이는 하늘로부터 다윗을 저주하라는 위임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행위를 정당화해 주거나 그의 죄책을 없애 주지는 않는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행 4:28) 그렇게 했을지라도 죄책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정하신다. 그러나 이것은 그분이 자기만족에 빠진 사람들의 사악함을 인정하신다거나 그들이 저지르는 악을 묵인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참으로 그렇지 않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the Author of sin)로 명백히 규정하고자 하는 열심 때문에 그분이 "죄에 대해 명령하시는 분"(the Ordainer and Order of sin)이심을 부인해 왔다.
인간은 그분의 방식을 이해하거나 그분이 어떤 행위의 조성자이시지만 그 행위의 악함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으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은 마치 물질계에서 바람과 물결들이 하나님에 의해 지배되듯이 죄 역시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제하에 있으며 그분의 도덕적 통치에 굴복한다는 중요한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분명히 이 주제는 어렵다. 그리고, 만약 할 수 있다면, 나는 앞으로 이 주제에 관해 보다 길게 설명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the Westminster Confession)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 측량할 수 없는 지혜, 그리고 무한하신 선이 그의 섭리에 크게 나타나므로, 섭리는 최초의 타락과, 천사들과 사람들의 다른 모든 죄들에까지 미치는데, 단순히 허용에 의해서가 아니고 그와 함께 자신의 거룩한 목적들을 위해 다양한 처리 방식으로 지극히 지혜롭고 강력하게 그곳들을 제한하시고 다른 경우들에는 그것들을 정하시고 통치하심으로써다. 그러나 그 죄악성은 오직 피조물로부터 나오며 하나님께로 나오지 않으니, 그는 지극히 거룩하고 의로우셔서 죄의 조성자나 승인자이시지도 않고 이실 수도 없다"(5장 4절).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분이 악한 인간들의 행위를 지도하시는 것을 통해 훼손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햇빛이 더러운 습지 위로 내리쪼인다고 해서 더러워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시므이의 마음을 가득 채운 증오는 그 자신에게 속해 있었으나, 그 증오가 그토록 명백하게 다윗을 향하고 그런 방식과 그런 시기에 그런 식으로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
"또 다윗의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삼하 16:11-12).😊
여기에서 우리가 숙고해야 할 두 가지 사항이 제기된다.
첫째, 다윗은 압살롬이 자기를 향해 일으킨 반란이라는 보다 큰 시련을 떠올리며 시므이가 자기를 저주하는 보다 작은 시련 앞에서 침묵했다.
둘째, 그는 하나님이 이 시련을 궁극적으로 자기를 위한 선이 되게 하실 가능성을 생각하며 위로를 찾았다. 이 사건의 실제적 가치는 그것이 성도가 극심한 시련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자신을 위로할 것이냐 하는 문제와 관련해 소중한 교훈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그 교훈들을 요약해 보자.🫰
첫째, 다윗은 자신의 죄가 자신이 받고 있는 것보다 더 심한 징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위로했다.
둘째, 그는 자신을 괴롭히는 도구들 너머에 계신 하나님의 공의의 손길을 바라보았다.
셋째, 그는 보다 심각한 고통에 대해 생각하면서 보다 사소한 고통을 하찮은 것으로 여겼다.
넷째, 그는 하나님이 악을 통해 선을 이루시리라는 소망을 가졌다.
우리 역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Arthur W. Pink 다윗의 생애3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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