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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53] The Life of Elijah 본문
아합과 만나다
앞에서 우리는 적막한 곳에서 살던 엘리야가 갑자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사악한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가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왕상 17:1)라는 무서운 심판의 말씀을 전했던 것에 대해 살펴보았다.
엘리야는 이런 심각한 말씀을 전한 후 주님의 명령을 따라 공적 삶의 무대를 떠나 은둔지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릿 시냇가와 사르밧에 있는 과부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자신의 명령을 따르는 자들이 실패하도록 방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그 두 곳에서 그에게 필요한 것을 기적적인 방식으로 공급하겼다. 그러나 이제 그 담대한 종이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 왕과 다시 맞서야 할 때가 이르렀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왕상 18:1).
인간의 부패한 마음
앞장에서 우리는 계속된 가뭄이 아합과 그의 백성들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인간의 부패한 마음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시느니라"(롬 2:4)고 전한다.
또한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사 26:9) 라고 전한다. 오늘날 이런 말씀들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진술인 것처럼 자주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말씀들에 이러진 말씀들은 거의 인용되지 않는다.
그 이어진 말씀이란, 전자의 경우에는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자의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사 26:10)이다.
우리는 이런 말씀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보통 사람들에게 이것들은 스스로를 부인하는 것처럼 보이고, 특히 이사야에서 인용한 구절의 두 번째 부분은 앞부분과 명백하게 모순되는 듯 보이니 말이다.
성경을 성경에 비추어 검토해 보면, 앞에 인용된 각각의 선언들에는 분명하고 명확한 예증이 따른다.
예를 들어, 다윗을 회개하게 만들고 그로 하여금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시 51:2) 라고 외치게 했던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 즉 그분의 "인자"와 "많은 긍휼"(1절)에 대한 인식이었다.
또한 탕자를 회개로 이끌어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했던 것 역시 아버지의 선하심, 즉 그분의 집에는 "양식이 풍족"(눅 15:17) 하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셔서 "온 땅의 모든 주민이 크게 요란하여 사람의 출입이 평안하지 못하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서로 치고 이 성읍이 저 성읍과 또한 그러하여 피차 상한 바 되었나니 이는 하나님이 여러 가지 고난으로 요란하게 하셨"(대하 15:5-6)을 때, 아사와 그의 백성들이 아사랴의 가르침을 따라 "가증한 물건들을 유다와 베냐민 온 땅에서 없애고... 여호와의 제단을 재건하고... 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니라"(8-12)라는 말씀을 읽는다.
다른 한편, 성경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현세적인 복과 영적인 복을 모두 누린 개인과 백성들이 그런 은혜를 통해 회개에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오용했던 경우들도 많이 나온다.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신 32:15, 호 13:6 참조).
또한 우리는 성경에서 개인과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그들이 "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오리다"(사 26:11)라는 말씀의 참됨을 보여 주는 경우들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눈에 띄는 경우 하나는 애굽의 바로 왕이었다. 그는 재앙이 닥칠 때마다 자신의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하고서 여호와 하나님께 계속해서 반항했다. 그러나 아마도 그보다는 유대인들의 경우가 더 분명한 예가 될 것이다.
유대인들은 주님의 심판으로 인해 오랫동안 고통을 당했음에도 여전히 그것을 통해 의를 배우지 못하고 있다.
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시대에 이런 진리를 보여 주는 놀라운 경우들을 목격한 적이 없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관대하심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근면함 때문에 우리에게 온 것으로 여긴다. 그로 인해 우리가 형통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점점 더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거룩한 선언들을 어떻게 이애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시느니라"(롬 2:4).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사 26:9).
분명히 우리는 그런 선언들을 절대적이거나 제한이 없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한 가지 조건하에서 진리로 인정해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조건이다.👣
자신의 선하심을 드러냄으로써 우리를 의의 길로 이끄시는 것이 하나님의 "분명한"(나는 그것을 "은밀한" 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계획이다. 그럼에도 행동이나 역경이 그 자체가 이런 유익한 결과를 낳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는 그분의 자비와 징계 어느 것도 우리의 상태를 향상시키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이 강퍅해진 죄인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한다"(롬 2:4). 그들의 형통은 그들에게 이의 교훈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성향을 제공한다.
설령 은혜의 도구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충실한 설교가 값없이 제공될지라도,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거룩하심에 관한 모든 말씀들을 모독하고 그것들에 대해 눈 감아버린다.🥺
하나님이 그들을 부드럽게 질책하시기 위해 손을 드실지라도, 그들은 그것을 경멸한다. 더 극심한 벌이 가해질지라도, 그들은 그것에 맞서서 자신들의 마음을 강철 같이 굳게 만든다.
우리의 상황은 늘 그와 같았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 마음 안에서 역사하기를 기뻐하실 때만, 우리는 가르침을 받을 마음을 갖게 되고, 그분이 우리를 벌하시는 것이 정당함을 시인하고, 악한 길에서 돌이키려고 한다.
하나님의 심판을 마음으로 분명히 시인하지 않을 때, 죄인들은 자기 내부에서 올라오는 확신을 억누르고 반항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에 삼켜지고 만다.
Arthur W. Pink 엘리야의 생애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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