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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eanings in Joshua 282_장문] 최후 정복(수 11:1-12:24) 본문

강해시리즈/여호수아 강해 (Gleanings In Joshua)

[Gleanings in Joshua 282_장문] 최후 정복(수 11:1-12:24)

En Hakkore 2024. 11. 17. 19:35

여호수아 11:6에서도 그랬다. 하나님의 약속 바로 다음에 명령이 뒤이어졌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족속의 말들의 뒷발의 힘줄을 끊고 그들의 병거를 불사르라는 명령을 그대로 지켜야 했다.

헨리( Henry)는 여호수아가 감당하게 되는 이 새로운 싸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그 싸움은] 영광스러운 싸움이었으니, 전공 면에서는 그 이전의 싸움보다 못하지 않았으나, 이적의 면에서는 그 이전의 싸움보다 못했다. 그 때에 그들을 위해 하나님이 일으키신 놀라운 역사는 그들 스스로 용맹스럽게 처신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베풀어진 것이었다. 복음을 전하는 일로써 사탄의 왕국을 상대로 치르는 전쟁도 이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이적들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그 후의 전쟁의 경우는 이미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이 충분히 입증되었으므로, 이제는 그 일을 행하는 자들이 우박이나 태양이 멈추어 서는 따위의 일을 기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 일상적인 도움에 의지하여 성령의 검을 사용하여 전쟁을 치르도록 하시는 것이다."

가나안 족속의 말들이 힘줄을 끊고 그들의 병거들을 불태우라는 명령이, 그것들이 전쟁터에서 사용되지 못하게 만들게 위함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여호수아는 "모든 군사와 함께 메롬 물가로 가서 갑자기 습격"했다(7절).

여호와께서 친히 야빈과 그의 동맹군의 도전을 받아들이셨고, 그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서 살육되게 하실 것임을 그분의 종에게 분명히 약속하셨으나, 그렇다고 해서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가 그저 가만히 그가 하시는 일을 보고만 있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과연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해 능력으로 역사하실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통해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이었다. 오늘날 특정한 부류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점이 분명히 강조되어야 마땅하다.

유사 칼빈주의(hyper-Calvinism) 혹은 일종의 운명론이 휩쓸고 있고, 또한 특정한 타입의 "승리하는 생활" (victorious life) 이라는 가르침이 영혼들을 호도하고 있는데, 이 모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행해지는 경우가 있다. 곧 신자가 외형적인 시험거리에 넘어가고 내주하는 죄에게 져서 넘어지는 경우가 그렇게 잦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가 개인적으로 자기 원수들과 싸우려 하는 큰 잘못을 범하기 때문이라고 가르치고 신자가 "믿음으로" 그 원수들을 그리스도께 넘겨드려서 그로 하여금 신자를 대신하여 그들을 무너뜨리게 하시게 하지 않으면 절대로 그 원수들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가르치며, 그 싸움은 신자의 싸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싸움이라고 가르치며, 그가 십자가에서 이미 사탄과 그의 졸개들에 대해 승리하셨다고 가르치며, 또한 우리가 완전히 그리스도께 우리 자신을 굴복시키면,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그의 승리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라는 식으로 가르침에는 것이다.

이런 식의 가르침은 겉모양이 아주 그럴듯해 보일만큼 외형적으로 진리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하는 모든 이들이 그 오류를 납득하고도 남을만큼 충분한 반대의 증거들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닥치는 가장 괴로운 문제점을 아주 복스럽게 해결해 주는 것처럼 보이고, 동시에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높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그런 식의 가르침은 인간의 책무를 부인하고, 우리 주님의 가르침을 거짓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믿음이란 그저 하나님의 약속들에 의지하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백성을 위해 행하신 일에 의존하는 것만이 아니다. 믿음은 선행을 이루고 계명을 지키는 길로 달려가며, 그가 우리에게 남기신 모범을 따라가는 것이기도 하다. 현대의 운동의 지도자 중 한 분은 이렇게 선언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에게 항복하면 죄를 대적하여 싸울 필요가 전혀 없고, 다만 죄와의 권세와 욕망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그는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록된 경험과 반대되는 것을 제시하는 것은 물론이요, 성경 자체에도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을 주장한다.

성경은 "죄와 싸우고", "대항하는 일"(히 12:4)을 말씀하고,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싸우는 것"(엡 6:12)을 말씀하며, 신자들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명령하며(딤전 6:12), "그리스도의 예수의 좋은 병사로... 고난을 받고",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라"고 말씀하며(딤후 2:3-4), 또한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당부한다"(엡 6:11).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수동적으로 보고만 있는 것이, 그리고 그 대변자들의 표어처럼 "우리는 가만히 있고 하나님이 다 행하시게 하는 자세"(Let go, let God)가, 과연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상적인 자세라면, 위에서 제시한 성경을 가르침들이나 그 비슷한 다른 가르침들은 전혀 소용이 없고,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신자가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승리를 얻을 수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힘을 주시기를 구해야 하고, 또한 그 힘을 수동적으로 전력을 기울여 사용해야 한다.

수동적인 "승리자" 를 논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장 말장난에 불과하다. 신자를 주의 전공(戰功)을 바라보기만 하는 방관자로 만든다는 것은 그들을 도덕적인 행위자 이하로 비하시키는 것이다.

"가만히 있어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 라는 말씀을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자"(히 12:1)라는 권면을 무효화시키는 것으로 오해하여 잘못 적용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달리는 것'은 '씨름하는 것' 이나 '싸우는 것' 처럼, 맹렬한 수고와 노력을 경주하는 것을 나타내는 비유적인 표현이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는 중에 예수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경주하여야 한다".

구주께서 사탄을 이기고 승리하셨다는 복된 사실을 귀중하게 기려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자 역시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는 사실이 뒤바뀌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곧 사탄을 우리 발 아래에서 밟으시리라고 약속하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약속은 아직 미래에 있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그분의 발등상이 되는 일도 아직 미래에 속한 것이다(히 10:13).

궁극적인 최후의 승리는 확실하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그 승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 여호수아 11장에서도 그랬다. 야빈과 그의 군대가 내일 몰살될 것이라는 신적인 확신이 주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임무 수행에서 면제 받은 것이 아니었다.

전에 평지의 성읍들의 경우(창 19장)처럼 하나님이 그 가나안 족속들을 하늘로부터 불이 내리게 하여 멸하시겠다고 선언하신 것도 아니요, 고라와 그 일당의 경우처럼(민 16장) 땅이 입을 벌려 삼키도록 하시겠다고 선언하신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다만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넘겨주어 뭘 살 시키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곧 전투에서 죽임을 당하게 하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그분의 종 여호수아가 그런 의미로 받아들였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를 비롯하여 그와 함께한 모든 용사들이 "습격" 했다고 말씀하니 말이다(수 11:7).

여호수아는 방어적인 위치를 고수하거나, 자신의 군대를 보호하기 위해 구덩이를 파고, 여호와께서 하시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구경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여호와의 약속을 완전히 신뢰하고서 행동 개시했고 맹렬하게 돌진하여 원수들에게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하나님은 "내일 이맘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남겨 주겠다" 고 말씀하셨고, 여호수아는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지체하지 않고 행동을 개시했다. 아마도 야빈은 여호수아의 그런 행동을 거의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첫 공격에 완전한 혼란에 빠졌다.✌️

Arthur W. Pink 여호수아 강해 p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