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산상수훈 176] 본문
염려하지 말라 4(마 5:30, 31)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 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30절).
이 말씀은 들꽃에게서 취할 만한 또 다른 교훈을 담고 있다. 즉 그 목숨의 연약함과 단명함이다. 만일 이 점을 우리 마음에 충분히 새겨둔다면 멋진 옷에 대한 세속적인 욕망을 바로잡게 될 것이다.
왜 우리는 결국에는 들에 핀 꽃들에도 견줄 수 없을 터인데 그러한 사치스러운 의상에 마음을 쏟고 자신의 의복을 자랑하며, 우리의 "단장" 을 아름다움 옷을 입은 외모로 하는가?
그러한 어리석은 허식은 그와 같은 과시가 부질없는 것임을 우리 스스로 깨닫게 될 때 한층 더 나쁘게 나타난다. 꽃들의 아름다움은 불과 몇시간 지속될 뿐이다. 다음 날이면 그것들은 시들어서 다른 잡동사니들과 함께 아궁이에 던져진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 머무는 날 수도 기껏해야 한순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도 우리는 곧 그 빛깔과 모양세가 변하고 이내 낡아버리는, 그러한 옷에 대해 자랑하며 스스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본문에서 질책하고 있는 것은 화려한 의복에 대한 욕망뿐만 아니라 또한 필요한 옷의 공급에 대한 염려이다. 30절 말씀에서 그리스도는 제자들과 설교를 들으러 모인 자들에게 그의 논증을 적용하신다.
주님은 여기에서 들풀과 사람을 대조하심으로써 28절에서 이미 언급하셨던 바, 염려에 대한 금지를 강조하신다. 들풀보다 사람이 더 탁월한 존재임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드러난다.
첫째로, 들풀이 사람의 유익을 위해 만들어졌지, 사람이 들풀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유익한 용도들 외에도, 그것들은 땔감으로 쓰여지는 것이다.
둘째로, 들풀은 오늘 있다가 내일에는 없는 것이다. 즉, 소멸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사람은 전연 다르다. 왜냐하면 비록 육체는 재로 화할지라도 그러나 그 존재는 불멸의 영혼, 즉 시작은 있으나 절대로 종말은 있을 수 없는 영혼으로 인해 소멸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사람은 들풀보다 훨씬 탁월한 것이다. 들풀의 생명은 그것을 이루는 그 물질로부터 생겨나 그 물질과 더불어 사라진다. 하지만 사람의 영혼은 그의 육체와는 다른 본질로서 육체가 죽을지라도 소멸되지 않는다.
사람과 그 외의 모든 다른 열등한 피조물들 사이의 커다란 차이를 하나님께서는 그들 각각의 창조에 관련해서 분명히 암시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창 1:11)고 땅에게 명하셨다.
그러나 사람을 지으셨을 때에는 비록 그 육체는 흙으로 만드셨지만 그의 영과 혼은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라는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것이었다.
사람의 이 탁월성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의심 많고 물질주의적인 사두개인들을 책망하실 때 강조하셨다.
즉 하나님을 그 육신이 이미 오래 전 흙으로 돌아갔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라고 말씀하시는 동시에 "하나님은 죽은 자[곧 전혀 생명을 갖고 있지 않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마 22:32)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의 이 같은 우월성은 마음을 산란케 하는 염려 없이 하나님의 보호와 섭리를 의존할 그의 의무를 강하게 주장한다.
왜냐하면 만약 창조주께서 한낱 초목을 위해 그토록 영광스러운 차림새를 주시고 있다면 분명히 그의 가장 귀중한 피조물이 벌거벗게 되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본문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끌어내신 결론이다.♡
Arthur W. Pink 산상수훈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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