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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fe of David131] 언약궤를 찾아옴(3)(사무엘하 6장) 본문

강해시리즈/다윗의 생애 (Life of David)

[The Life of David131] 언약궤를 찾아옴(3)(사무엘하 6장)

En Hakkore 2024. 2. 24. 16:00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블레셋을 격퇴한 후 오랫동안 안타깝게 무시되어 왔던 언약궤에 대한 거룩한 관심을 드러냈다. 하나님의 영광을 열망했던 그는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고 그분의 임재에 대한 상징을 안치할 곳을 마련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기 위해 이스라엘의 지휘관들을 모두 불러모았다(삼하 6:1).

아, 그러나 그는 그런 경우와 관련해 하나님이 주신 지침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언약궤를 레위인들의 어깨로 메어 옮기는 대신 이방 사람들의 악한 사례를 따라 새 수레에 실어 옮겼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명백하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그것을 인간이 고안한 것으로 대체했다.🥺

다윗이 수행한 일은 참으로 훌륭한 것이었고, 그의 동기는 순수했으며, 그의 계획은 칭찬 받을 만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잘못된 방식으로 수행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 안에 "여호와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라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을 도입했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 문제에 관해 어떤 뜻을 갖고 계신지 묻지 않았다. 즉 언약궤를 어디에 실어야 할지에 대해 묻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 문제를 혈과 육을 가진 사람들과 상의했고, 바로 그 점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렀다. 우리는 이것을 신중하게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는 성경을 참고하는 대신 사람들의 조언을 구했다. 물론 그가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지휘관과 더불어 의논"(대상 13:1)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욥기 32장 9절이 말씀하듯이,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실은 이 경우를 통해 잘 드러났다.

그들은 다윗에게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 주셨던 지침들(민 4:5-6; 15:7, 9)을 상기시키는 대신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의 방식을 권했다(삼상 6:7-8). 그렇게 함으로써 다윗은 그의 좋은 계획을 망쳤고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했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절차를 떠났기에 좋은 일이 나쁘게 끝난 것이다.

위의 사건은 우리에게 특히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수행하고 있는 이들에게 교훈이 되도록 기록된 것이다. 그것은 엄중한 경고를 제공한다. 그것은 우리의 열정이 올바르게 감독되어야 할 긴급한 필요를 보여 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닌"(롬 10:2) 경우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열심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고 그분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고자 하나 그분의 말씀이 제공하는 지식에 의해 규제되지 않는 열심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하고, 그분의 복음을 널리 전하고, 사람들을 그분께 인도하려는 열정 때문에 그분의 명령을 잊고서 "그분의 일"을 "우리의 방식으로" 수행하기 쉽다.

그런 위험은 아주 실제적이다. 그리고 오늘날처럼 활동적이고 분주한 시대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악에 빠진다. 많은 이들이 그들이 하는 일의 양(量)에 관심을 갖지만, 그 일의 질(質)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들은 포도원에서 적극적으로 일하지만, 그 일을 어떻게 수행해야 할지에 관한 그분의 안내서는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

당혹과 실망

다윗이 좋은 의도를 갖고 시도했던 일은 실패로 끝났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진노를 드러내셨다.

다윗은 수많은 연주자들에게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삼하 6:5) 연주를 하게 하면서 언약궤 앞에서 걸어갔다. 그러나 그들이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언약궤를 실은 수레를 끌던 소들이 비틀거렸고, 웃사가 손을 내밀어 언약궤를 붙들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삼하 6:7).

이것은 즐거운 행렬을 가로막는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에 대한 깊은 성찰과 우리의 잘못에 대한 참회의 고백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나의 노여움을 일으키지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해하지 아니하리라"(렘 25:6).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괴롭히실 때 우리는 우리가 어쩌다가 그분의 노여움을 일으켰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진노가 분명하게 드러났음에도, 그것은 여전히 적절한 결과를 초래하지 못했다.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삼하 6:8).

다윗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중요한 일, 즉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던 언약궤를 명예롭게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얼마간의 자만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기대했던 것과 어긋나게 전개되자 그는 당혹스러웠고, 토라졌고, 불쾌해졌고, 이 구절이 쓰인 히브리어가 실제로 의미하는 것처럼 "화가 났다."

그의 분노는 웃사가 하나님을 모욕한 것에 대한 의로운 분개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계획이 어그러진 것에 대한 원한이었다. 그의 오만함이 상처를 입었다.

다윗은 웃사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은 것 때문에 자기 백성들 앞에서 양양해질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백성들 앞에서 우스운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잘못은 그에게 있었다. 따라서 스스로 비난을 짊어져야 했으나 오히려 토라진 아이처럼 행동했다.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회초리를 맞으면서 그것 때문에 화를 낸다면, 우리는 죄에 죄를 더하는 셈이다. 그것은 주님의 징계에 대한 모욕이며, 따라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히 12:5).

"그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베레스웃사란, 난외주가 알려 주듯이, "웃사를 침"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다윗은 하나님이 웃사를 치셨던 것을 기념함으로써 후손들이 성급하고 불경해지는 것에 대한 경고로 삼았다. 여기에 기록된 내용은 사무엘하 5장 20절에 기록된 내용과 엄중하게 대조된다.

거기에서 다윗은 "르바임 골짜기"의 이름을 "바알브라심"("바알을 쳐부순 곳")으로 바꼈는데, 그것은 여호와의 물을 흩음 같이 내 앞에서 내 대적을 흩으셨기 때문이었다." 거기에서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했는데, 반면에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있다.

이 경우에 다윗이 취한 태도는 통탄스럽다. 왜냐하면 인간이 여호와의 처사에 대하여 분개하는 것은 지극히 괘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경고에 비추어 본다면 우리의 조급함은 훨씬 더 나쁘다.

다윗은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춰야 했고(벧전 5:6)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잘못을 고쳐야 했고(잠 28:13), 인간이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시인해야 했다(시 99:8).

그렇게 했다면 그는 마땅히 비난 받아야 할 것을 비난하고, 다른 이들에게 선한 모범을 보이고, 여호와의 의로우심을 입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오만한 마음을 누그러뜨리지 못했고, 불같은 성격을 다스리지 못했고, 그로 인해 큰 복을 놓치고 말았다.

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실패하는가! 대개 우리는 "불속에서라도 여호와를 영화롭게"(사 24:15, glorify ye the LORD in the fires, KJV- 역주) 해드려야 한다는 명령을 주의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은 자신을 가차 없이 심판하고 우리의 불순물을 태워 없애 줄 불꽃의 필요성을 시인하는 것이다.🤞

Arthur W. Pink 다윗의 생애2 p102

■ 베레스 웃사 (Perez Uzzah)

하나님보다 스스로 더 높아지려는 
자신을 "베레스 웃사"하라

말씀보다 자신의 경륜을 더 중요시하는 
자신을 "베레스 웃사"하라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인기에 영합하려는
자신을 "베레스 웃사"하라

자기 야망을 위해 하나님 말씀을 왜곡하려는
자신을 "베레스 웃사"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부적이나 장식품으로 이용하려는
자신을 "베레스 웃사"하라

진리의 대가가 불이익일까 두려워 진리를 외면하려는 
자신을 "베레스 웃사"하라

경건의 삶보다 아무도 모르게 욕망의 늪에 침잠하려는 
자신을 "베레스 웃사"하라

어떤 직책에 있던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려는 
자신을 "베레스 웃사"하라

인간의 일생(이재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