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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시리즈/출애굽기 강해 (Gleanings In Exodus)

[Exodus 93]

En Hakkore 2024. 6. 17. 22:03

유월절 2(출애굽기 12장).

6. "이 달 열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출 12:6).

여기에 유월절의 어린양이 죽임을 당할 정확한 시간이 한정된다. 그것은 '간직하였다가' 또는 니산의 열나흗날까지 두었다가 저녁에 또는 더 문자적으로 '저녁 사이에' 라고 하면서 그 달의 십사일과 십오일 사이에 잡으라고 하였다..

이 사실에 대한 원형의 성취를 엄밀히 지적하려면 부득이 아주 많은 신약성경의 구절들을 고찰해야 한다. 다만 각 사복음서에서 언급하신 말씀들을 아주 세밀하게 비교해 봄으로써 주 예수께서 니산의 십사 일과 십오일 사이에 돌아가셨음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들에 앞서 다른 이들이 이 임무를 담당했는데 그 중에서 제일 나은 것은 아마도 컴패니언 성경(Companion Bible) 제5항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독자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복음의 마지막 장들을 연구하노라면 하나님의 어린양은, 성전에서 유월절의 어린양이 죽임을 당한 바로 그 시간에 죽임을 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7. "이 달 열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it) 잡고"(출 12:6).

여기에서 모형(type)은 원형(antitype)으로 바뀐다. 이 점은 사실상 매우 충격적이다. 수천의 많은 양들이 애굽에서 잊었던 그 잊어서는 안 될 밤에 죽임을 당해야만 했으나, 여기 여호와께서 이 지시를 모세에게 전달하실 때에는 고의적으로 단수를 사용하셨다.

즉, 이스라엘은 '그것들'이 아니라 "그것을(it) 죽일지니라"고 하셨다. 출애굽기 12장 전체를 통하여 단 한 번도 '양들' 이라는 복수를 쓴 적이 없음은 매우 괄목할 만한 사실이다. "하나님의 심중에는 단 한 가지만 갈보리의 어린양 - 있을 뿐이었다"(Urquhart).♡

8.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출 12:8).

어린양을 죽이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그 고기를 먹으라고 하셨다. 이것은 피가 외부의 심판으로부터 안전한 보호가 된 것처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예비하심이었다. 여행이 이스라엘 앞에 놓여 있었기에, 먼저 그들의 힘을 돕기 위한 음식이 필요했다.

성경에서 '먹는다' 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데, 전유(내것으로 삼음)와 교제이다. '어린양'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말하며, 그의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양식이다. 즉 '생명의 떡'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심령보다 뛰어난 대상이시다. 우리가 그를 먹음으로써 우리의 영혼이 힘을 얻고 그는 영광을 받는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생명의 떡으로 지명하신 죽음이 있다. 우리는 너무도 이것과 친숙하다는 사실에 의해 그 중대성을 망각하기 쉽다. 만일 우리가 심오한 하나님의 지혜의 교훈 안에서 그 가르침을 이해하도록 바로 배웠다면, 우리는 자연이 그 어디에서나 우리를 교육하고 있음을 본다!

내어 놓은 생명은 생명을 위한 음식이 된다. 이 일은 인간에게 홍수가 나기 전까지는 시작되지 않았다. 적어도 우리가 그 일에 대한 신성한 허락을 이해하는 것은 오직 홍수이후이다.

그리고 우리가 대홍수 속에서 그 주된 모습과 구원의 방주, 그 속에 새로운 세계의 핵심원을 실은 것,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하시고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우리를 새로운 창조로 옮겼는지에 대한 그 의미심장한 모습을 볼 때,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가지는 그 비유는 얼마나 가슴을 벅차게 하는가!

죽음을 식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은 오직 죽음(다만 진실로 그러한 것으로부터)에서 도피하고, 그 죽음에서 구원되는 것과 같다. 이로써 삼손의 수수께끼가 풀린 것이니,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다.

죽음은 단지 정복하고 그리고 물리치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를 위한 거룩한 사랑과 능력의 감미롭고 오묘한 과시가 인간의 연약함이라는 신비 속에서 성취되었던 것은 십자가 안에서 이다.

죽음은 생명 - 그렇다, 영원한 생명 - 의 빵이 되었다."(F. W. Grant).

그러나 그 양은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도록" 되어 있음을 주의 깊게 보라. 성경에서 '누룩'은 한결같은 죄악을 상징한다. 여기에서 가르쳐 주는 교훈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신적인 거룩성에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구별되어 그리스도만이 참된 양식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알려진 죄에 탐닉할 때에는 그와의 사귐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다만 "그가 빛 가운데 계심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서 행할 때"에만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모든 죄악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며,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다"(요일 1:7).

'쓴 나물'은 그리스도인 가운데 있는 양심의 가책을 말한다. 우리는 그러한 고난을 필요로 하도록 만드는 그 무엇, 즉 우리의 죄를 기억함이 없이는 "고난에 참여"(빌 3:10)할 수 없으며 또한 이러한 것들에 대한 기억을 통하지 않고는 단련된 정신을 보여줄 수 없다.

Arthur W. Pink 출애굽기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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