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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기도 41] 제8장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기도 (Effectual Fervent Prayer)

[영적인 기도 41] 제8장

En Hakkore 2024. 5. 3. 11:50

베드로전서 5:10,11(II)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사."

앞 장에서 우리는 (굳윈의 분석을 따라서) 이 지극히 거룩한 칭호가 하나님께서 그 자신 안에 계시며 그의 영원한 계획 안에 계시며, 또한 그의 백성들을 향한 그의 행위 안에 계시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효과적인 부르심과 관련하여 서로 연관이 있는 세 가지 사실을 살펴보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효과적인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한 영혼을 본성의 암흑으로부터 그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다(벧전 2:9).

즉각적이고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회개하게 하고 믿음의 대상을 믿게 하는 성령의 이 특별한 내적인 부르심은 이와같이 새로 믿는 이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진리 안에서 그에게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첫번째 증거 또는 외적인 증거가 된다.

그것이 비록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의 첫 출발은 아니지만 그것은 영원으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 쏟아져 내렸다는 증거이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롬 8:30).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너희를(자기 백성을) 택하사 구원을 얻게 하셨다"(살후 2:13,14).

적당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믿을 수 있게 해주는 성령의 불가항력적인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셨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엡 2:8)이기 때문에 그들은 은혜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된다.

또한 그들은 "은혜의 택하심"(롬 11:5)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주어졌다. 그들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택하시어 하나님 은혜의 영원한 기념비가 되게 하셨다.

중생은 택하심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우리를 부르시도록 하나님을 감동시키신 것은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는 은혜라는 사실이 디모데후서 1장 9절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를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중생(또는 효과적인 부르심)은 하나님의 예정의 결과이지 그 원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실 것을 결정하셨으며 그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의 참여자가 될 것을 정하셨다. 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에 항상 그의 다른 완전성과 조화를 이루시며 행하신다 할지라도 우리를 향하신 그의 선하신 뜻이 너무도 확고한 것이어서 그의 값없으신 은혜의 모든 결심을 수행하는 일을 그 어느 정도 방해할 수 없다.

굳윈은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는 일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특권이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셨다는 것과, '그래서 인간들은 마음대로 행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라는 반문을 받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하나님께서는 금하신다. 우리는 그러한 주권을 그렇게 이해하기를 거부한다. 마치 그것은 아무런 규칙도 없이, 더구나 규칙에 반대하면서 사람을 구원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 준다. 하나님을 "모든 은혜의 하나님"으로 말하고 있는 바로 그 구절은 우리의 구원에 관하여 "우리를 부르사"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데 우리를 부르신 것은 거룩하신 부르심이다(딤후 1:9).

비록 주님의 토대가 확고하게 서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딤후 2:19). 그렇지 아니하면 그는 구원될 수 없다는 말이 덧붙여지고 있다. 우리가 고린도후서 1장 3절의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란 말과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란 말을 비교하여 보면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이러한 칭호를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을 더욱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두 가지 말 사이의 주된 차이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란 말이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라는 말씀에서 나타나는 바와같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베풀어 주시는 면에 더욱 제한되어 있다는 되어 있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신 그분은 모든 진정한 위로와 수여자요 모든 환난 아래에서 견디게 해주시는 분일 뿐만 아니라 모든 현세의 위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들로부터 얻어내는 모든 자연의 상쾌함과 유익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복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분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 즉 하나님을 찾게 하시고, 소생시키시고, 용서해 주시고, 깨끗케 하시고, 공급해 주시고, 회복시키시며, 보호해 주시고, 영광스럽게 하시는, 곧 모든 종류의 은혜와 넘치는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비록 "모든 위로의 하나님" 이란 표현이 우리가 여기에서 살펴보고 있는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란 칭호를 설명하기에 도움이 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을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베풀어 주시는 은혜가 위로의 은혜보다 더욱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가 위로를 주시지 않는 곳에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빛을 밝히시는 은혜는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의 고통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때때로 구원받기 전에 긴 시간이 지속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때에 견디게 해주시는 은혜는 위로가 없는 곳에도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에 따라 정확하게 모든 은혜를 나누어 주신다

하나님 안에는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은혜가 들어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한 데에 정확하게 그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값 없이 베풀어 주시는 호의는 그것이 나타내야 할 가장 좋은 때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을"(히 4:6) 수 있고 솔로몬이 이야기한 바와같이 주 하나님께서 "날마다 당하는 대로"(왕상 8:59)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목적을 지지해 줄 수 있는 은혜의 보좌에 담대하게 나아오도록 값 없이 부름받았다.

그렇게 해주시는 분은 모든 일에서 뿐만 아니라 언제나 우리를 다스리시는 우리의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다. 즉, 사도 바울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즉, 오직 인간들이 감당할 시험만이 있다. 왜냐하면 성령을 거스리는 죄는 사단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자에 의해서와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통치를 방해하려는 그의 계획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케 하시느니라"(고전 10:13)고 선언하고 있다. 주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는다"(마 12:31)라고 선언하신다.

왜냐하면 모든 은혜의 하나님은 모든 종류의 죄에 대해 회개케 하시고 용서하시기 때문이다. 즉, 베드로와 다윗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바와같이 회심하기 이전에 범한 죄뿐만 아니라 회심한 후에 번함 죄도 용서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호 14:4)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각자는 체험을 통해서 "우리 주의 은혜가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 1:14)라고 실감있게 말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Arthur W. Pink 영적인 기도 p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