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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실천 43] 그리스도인의 출발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실천 (Practical Christianity)

[영적인 실천 43] 그리스도인의 출발

En Hakkore 2024. 4. 19. 11:42

4. 마음의 변화(3)

'씻음받았다'는 것은 구약 성경의 성취이다.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겔 36:25).

디도서 3:5은 새로운 출생이 새로운 성질(new nature) 그 이상의 어떤 것, 즉 '중생의 씻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명백히 증언한다(엡 5:26 참고). '씻음받았다'는 것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는 것과 구별된다는 점에 주의를 디울여야 한다. '씻음받았다'는 것은 직책의 제거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령에 의해서 결과한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우리 안에 행하신 어떤 것으로 이루어져있음이 틀림없다. 부정한 문둥병자가 깨끗해졌다.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 그는 오염으로부터 깨끗해졌으며 그의 마음음 "청결"케 되었다(마 5:8).

그것은 죄를 사랑함과 죄를 실천함으로부터 벗어난 도덕적인 청결 내지는 성경의 정화이다. 먼저 '씻음'받고 그리고 나서 '거룩함'에 이른다. 그리고 구별되게 하나님의 쓰임에 합당한 그릇으로 하나님께 봉헌되어진다. 그것에 의해서 우리는 우리 칭의의 증거를 획득한다.

즉 죄책의 말살과 의(義)의 전가를 의미한다. 칭의는 성령으로부터 출처된 것인데, 왜냐하면 그는 죄인을 의롭게 해주는 신앙의 창안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가려지지 않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나라"(고후 3:18). '수건을 벗은 얼굴'에는 의심스런 관련구절과 대조가 있다.

첫째는 모세의 얼굴을 가린 수건에 대한 것인데(13절) 그것은 유대교의 불완전성과 무상함을 상징한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그리스도인은 그의 아들의 인격과 사역 속에서 충만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제시되신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

둘째로, 회심하지 않은 유대인들의 마음을 덮고 있는 수건에 대한 것인데(16절), 그들과 대조적으로 주께로 돌아선 사람들은 판단을 흐리게 하는 영향력들과 편견이 그들로부터 제거되는 경험을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런 장애물도 없이 복음을 볼 수가 있다.

그의 완전하심의 총계인 '주의 영광'은 말씀 속에서 계시되고 빛난다. 특별히 복음 속에서 더욱 그렇다. 그의 영광은 성령에 의해서 산출되고 발제된 신앙에 의하여 포착되는데, 포착자는 점차적으로 변화하여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한다. 그리고 행위와 성격에 있어서도 더욱 더 그와 일치하여 간다.

'변한다'(metamorpboo)란 동사는 로마서 12:2의 "변화되다"(transformed)와 마태복음 17:2의 "변형되다"(transfigured)와 같은 말이다! 고대인들의 거울은 연마한 금속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강렬한 빛이 거울에 비취면 매우 뚜렷한 형상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빛의 광선이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의 얼굴로 되돌아왔다.

그래서 거울이 은이나 놋으로 된 것일 경우 백색 또는 금빛의 불꽃이 들여다보는 사람의 얼굴을 물들였다. 성경은 주의 영광이 발견되는 '거울'이다. 성령께서 영혼에게 비추시고 신앙과 사랑을 일으키실 때 그 영혼은 주와 같은 형상으로 변한다.

주의 영광은 복음에 의하여 밝혀지고 성령의 변형시키는 사역을 통하여 수납자의 마음에 반영된다. 마음이 그리스도의 완전하심으로 점령되고, 지성이 그것을 묵상하며, 그리고 의지가 그리스도의 교훈에 복종함으로써 우리는 그의 영을 마시며 그의 거룩함에 참여자가 되며, 그의 형상을 닮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보지 못하므로 이 지상에서의 변형은 불완전하다. 우리가 그의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때에만 온전히 "그와 같게" 되리라.(요일 3:2)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만일 우리가 논리적이고 신학적인 순서를 엄격하게 따라왔다면, 이 주제도 훨씬 먼저 취급했어야 할 우리 주제의 또 하나의 국면이다.

왜냐하면 지각에 비춰지는 영적 조명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피조물을 회복시키시는 초두에 우선적으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타락한 피조물은 나면서부터 하나님에 대하여 완전히 무지한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그의 본질적인 상태는 "흑암"과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아있는 상태이다(마 4:16).

그 "흑암"은 영적인 것들에 관한 단순한 지적 무지보다는 한층 더 무서운 어떤 것이다. 그것은 적극적이고 강력한 "능력"이며(눅 22:53), 악의 본질이다. 이 악의 본질은 하나님을 상습적으로 거역하는 것이며 타락한 인간의 마음이 사랑하는 것이다(요 3:19).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명령과 전능한 능력만이 그 흑암을 능가할 수 있으며, 하나님만이 홀로 "어두움으로부터 그의 기이한 빛으로" 영혼을 불러들일 수 있으시다.

Arthur W. Pink 영적인 실천 p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