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영적인 실천 42] 그리스도인의 출발 본문
4. 마음의 변화(2)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 바로 앞서 숙고한 구절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경험하는 위대한 변화의 적극적인 면을 묘사한다면, 이 구절은 그 변화의 부정적인 면을 취급한다.
로마서 7:7-11에서 사도는 중생시에 자신이 경험한 것들 중 한 경험을 진술하고 있다고 주석가들은 보통 동의한다.
첫째, 사도는 '깨닫지 못할'(without thr Law) 때가 있었다고 말한다.
중생 전에 그는 거만한 바리새인들이었다. 비록 유명한 랍비인 가말리엘 아래서 가르침을 받았고, 그의 주요직책이 율법을 연구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하였다. 즉 그 율법의 의도와 그것의 능력에 대한 심층적인 지식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단지 그 율법의 요구에 대해 외적인 일치만이 필요한 전부라고 생각했으며, 또 그것에 엄격하게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에 스스로 즐거웠으며 자기 의에 만족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께 용납되었다고 확신했다.
둘째로, "계명이 이르매." 7절 말씀은 여기 계명이 성령께서 확신의 화살로서 사용하셨던 십계명이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탐내지 말라"는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하였을 때, 이 말씀이 성령의 조명과 확신케 하는 능력과 거불어 그의 양심에 다가왔을 때, 자기 의의 허구성이 드러나고 자기만족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금지된 '생각조차도 해선 안된다'는 하나님의 금령은 하나님의 율법의 엄격성과 영적 의미에 대해 놀라우 힘으로 그의 마음에 호소하였다. 이것은 마치 맑은 하늘의 벼락 같았다.
그리고 '자기 뜻(self will)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말씀이 그를 관통하였을 때, 그는 율법의 거룩한 요구에 외적으로 순응하는 것만큼이나 내적으로도 순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죄는 살아나고"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는 거룩하고 다양한 하나님의 규칙(the Divine Rule)에 대항하여 일어나는 자신의 정욕들을 의식하였다. 하나님께서 "탐내지 말라"라고 말씀하셨다는 그 사실이 더욱 중압감을 느끼게 했으며, 그가 이전에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행동들이 부패한 행동들이었음을 일깨워주었다. 그가 내부의 부패성들을 복종시키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자신의 무기력함을 인식하고 더욱 더 고통을 느꼈다.
세때로, 그는 자신의 이해와 감정에 있어서 '나는 죽었도다'라고, 스스로 평가하였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내적 부패성과 마음의 역병을 깨닫기 전에는, 자신이 도덕적으로 최상의 삶을 살고 있고, 의식법의 다양한 요구들을 매우 면밀하게 수행한다고 생각하여 스스로를 선한 사람으로 간주하였다. 자신의 견해에 따르면 그는 율법에 의해 정죄받지 않는 '살아있는' 사람이었고, 따라서 미래의 형벌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그러나 십계명이 그의 양심에 일격을 가했을 때 그는 율법의 영적인 의미를 깨달았고, 자신이 율법에 대해 단지 추상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그의 내적 부패와 죄된 욕망, 사상, 그리고 생각에 대해 확연히 인식하였으므로, 그는 자신이 영원한 죽음을 받아야 할 정죄받은 죄인임을 깨달았다.
이것은 위대한 변화에 있어서의 또 다른 본질적 요소이다. 이것은 사실 이 변화에 대한 성경의 다양한 언급들을 성경에 기록된 순서대로 추적하여 나아가는 입장에서보다는 오히려 신학적인 순서상 훨씬 앞에서 언급되어야 했었다.
이 본질적인 요소는 죄에 대한 확신과 자신의 지위상실에 대한 확신, 그리고 인간의 자력이나 자신의 의는 전적으로 무가치하다는 그런 학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에서 언급된 자들은 9절과 10절에서 언급된 방종하고 사악한 인물들을 말한다.
매튜 헨리는 그들을 다음과 같이 평한다. "사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괴물들이다. 회심 훙[ 현저하게 선해진 사람들은 전에 특별하게 악한 사람들이었음에 주의하라". 그렇게도 비열하고 저급했단 사람들이 개심하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런 변화인가!
그 위대한 변형은 여기서 세 가지 단어에 의해 묘사되었다. "씻음, 거룩함, 의롭다 하심." 이 글을 읽는 자 중에 자기 자신을 정통주의의 챔피언이라고 간주하는 몇몇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낯설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첫번째 단어인 '씻음'이란 말을 판연하게 거부하지는 않더라도, 그들은 새로운 창조와 그 창조시에 그리스도인에게 전달되는 내용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매우 제한하기 때문에, 새로운 창조시에 오는 본래 상태의 어떤 변화와 청결함은 놓치고 말았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된 것처럼 참으로 '씻음'을 받았다. 문자적으로 말인가? 그렇다. 물질적인 의미(material sense)에서 그렇다. 그러나 도덕적으로는 아니다.
Arthur W. Pink 영적인 실천 p119
'성장시리즈 > 영적인 실천 (Practical Christianit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적인 실천 44] 그리스도인의 출발 (0) | 2024.04.19 |
---|---|
[영적인 실천 43] 그리스도인의 출발 (0) | 2024.04.19 |
[영적인 실천 41] 그리스도인의 출발 (0) | 2024.04.19 |
[영적인 실천 40] 그리스도인의 출발 (0) | 2024.04.19 |
[영적인 실천 39] 그리스도인의 출발 (0) | 2024.04.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