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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69] 아브라함과 롯(창세기 13장) 본문

강해시리즈/창세기 강해 (Gleanings In Genesis)

[창세기 강해 69] 아브라함과 롯(창세기 13장)

En Hakkore 2024. 3. 17. 10:52

앞 장(章)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로부터 하란으로, 그리고 하란으로부터 가나안으로 옮긴 것을 추적했다. 하나님이 부르신 땅에 도착한 후 그 땅에 기근이 일어났는데, 이러한 위기의 때에 아브라함은 믿음을 잃고 롯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갔다.

오늘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그러한 잘못의 결과들 가운데 일부를 우리 앞에 보여 준다. 하나님은 은혜와 신실하심 가운데 당신의 방황하는 자녀를 회복시켜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믿음의 길로부터 이탈한 결과는 그의 남은 날들을 계속적으로 괴롭혔다.

심음과 거둠의 법칙은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법칙이다. 그것은 신자와 불신자를 불문하고 동일하게 적용된다.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감으로써 두 가지를 얻었다. 그리고 그 두 가지는 모두 그에게 장애물과 저주가 되었다. 비록 마지막에는 하나님에 의해 모두 회복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오늘 우리는 그 두 가지를 창세기에 나타나는 순서와 반대로 다루고자 한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창 16:3).

사라는 애굽에 머무는 동안 하갈을 자신의 여종으로 취했다. 하갈이 아브람의 가정에 가져다 준 분란과 시기와 다툼에 대해 여러분은 잘 알 것이다. 그 모든 것의 절정은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에게서 나타나는데, 그는 이삭을 놀리다가 마침내 아브라함의 장막으로부터 쫓겨났다(21:9).

아브람이 애굽에서 얻은 것처럼 보이는 두 번째 것은 큰 부요였다.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아브람이 가축과 은과 금으로 부요하였더라"(13:1, 2, 한글개역개정판에는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음).

우리는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가축"에 대해 처음 읽는다. 이러한 언급에 이어 곧바로 많은 가축이 그와 그의 조카 롯 사이의 다툼의 원인이 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또 여기가 성경에서 "부요"라는 단어가 처음 언급되는 곳이라는 사실 역시 매우 주목할 만하다. 어느 때든지 "부요"는 항상 "많은 근심으로써" 그것을 소유한 자를 찌른다(딤전 6:7).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창 13:5).

지금까지 우리는 롯에 대해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는 아브람의 권속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아브람이 어디로 가든 항상 함께했다. 아브람과 롯의 성격과 삶의 방식은 매우 대조적이다. 성령께서는 종종 매우 대조적인 성격의 두 사람을 함께 제시함으로써 우리가 유익한 교훈을 얻도록 만드신다.

가인과 아벨, 모세와 아론, 사무엘과 사울, 다윗과 솔로몬 등이 그에 대한 두드러진 예(例)다. 거의 모든 측면에서 롯은 아브람과 대조된다. 아브람은 믿음으로 행한 반면, 롯은 보는 것으로 행했다. 이브람은 관대하며 아량이 넓은 반면, 롯은 탐욕적이며 세속적이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세우신 도성을 자신의 본향으로 삼은 반면, 롯은 사람에 의해 세워지고 하나님에 의해 무너진 도성을 자신의 본향으로 삼았다. 아브람은 모든 신자들의 조상인 반면, 롯은 부끄러운 이름을 가진 자들의 조상이다. 아브람은 "세상의 상속자"가 된 반면(롬 4:13), 롯은 소돔에서 모든 것을 잃고 마침내 "굴"에 거하는 신세가 되었다(창 19:30).

롯의 생애는 참으로 비극적인 생애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의 생애는 우리에게 좋은 경고가 된다. 이제 그의 생애를 개략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1. 롯이 아브람으로부터 떠남.

이것은 창세기 13장에 묘사되어 있다.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6, 7절). 우리는 세상의 일시적인 소유와 재물로 인해 심지어 가장 가까운 친족 사이에서조차 자주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한다.

여기의 기록은 매우 짤막하기는 하지만 누가 잘못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어지는 롯의 행동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복주신 사실은 잘못한 쪽이 롯이었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 이유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롯이 애굽으로부터 가져온 것은 단지 가축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가축 외에 또 다른 것을 가져왔다. 그는 애굽의 전신에 물들었으며, 그곳의 "고기 가마"의 맛을 보았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8, 9절).

아브람은 자신과 조카 사이에 불화가 생길 위험이 있음을 내다보았다. 종들 사이에서 시작된 다툼은 아마도 주인들 사이의 다툼으로 끝날 것이었다. 친족 사이의 불화를 피하기 위해, 아브람은 서로 나누어질 것을 제안했다. 위로부터의 지혜는 첫째는 성결하고 다음으로는 화평을 추구한다. 아브람은 영으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는 신적 훈계를 실천했다(롬 12:18).

아브람이 롯에게 한 제안은 너무도 관대한 것이었다. 반면 롯은 탐욕 가운데 아브람의 제안으로부터 최대의 이익을 취했다. 그는 선택권을 삼촌에게 양보하지 않았다. 그가 한 행동과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는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10, 11절).

롯이 "눈을 들어 바라보았다" 는 표현을 주목해 보라. 다시 말해서 그는 믿음으로 행하는 것보다 보는 것으로 행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이런 롯이 아브람 곁에 남아 있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뜻이 일치하지 않는 두 사람이 어떻게 동행할 수 있단 말인가?

아브람은 "보이지 않는 자를 보는 것처럼 하여 참았다"(히 11:27). 반면 롯의 마음은 보이는 일시적인 것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동거할 수 없었다"(6절).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롯은 "눈을 들어 바라보았다." 바로 이것이, 그 끝이 완전한 수치인, 내리막길의 시작이었다. 눈은 유혹이 영혼을 공격하는 주된 통로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lust of the eyes)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

이것은 에덴 동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창 3:6). 또 아간의 고백을 들어보라.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수 7:21).

여기에 나타나는 순서를 주목해 보라 -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먼저 그는 보았으며, 다음으로 탐을 냈으며, 마침내 취했다. 이것은 롯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그는 눈을 들어 바라보았으며, 그리고 나서 그것을 선택했다. 10절을 다시 한 번 주목해 보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여기의 마지막 구절은 얼마나 의미심장한가! 그것은 우리에게 롯의 마음이 여전히 "애굽"에 밀착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보는 대로 보지 않으신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롯의 세속적인 눈에 요단 평지는 "온 땅에 물이 넉넉하여 여호와의 동산 같이 보였다. 그러나 전능자의 거룩한 눈에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다(13절).

Arthur W. Pink 창세기 강해 p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