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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시리즈/엘리야의 생애 (The Life of Elijah)

[연재 42] The Life of Elijah

En Hakkore 2025. 6. 25. 13:24

엘리야의 침착한 대응

"엘리야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 하여"(왕상 17:19).

앞 장 서두에서 나는 열왕기상 17장의 후반부가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보여 준다고 말한 바 있다. 무엇보다 그는 소박한 음식물에 만족해했다. 그는 매일 똑 같은 음식에 대해 아무런 불만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제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그 과부의 큰 도발 앞에서 어떻게 처신했는지 보게 된다. 이 흥분한 과부의 감정의 폭발은 그녀의 집에 구원을 가져다주었던 사람에게는 아주 잔인한 짓이었다.

이 여자가 했던 말, 즉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라는 말은 너무나 터무니없고 부당하기 때문에, 엘리야는 그것에 대해 격한 반응을 보일 수도 있었다.

그의 내부에서 하나님의 누그러뜨리시는 은혜가 작동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왜냐하면 엘리야는 천성적으로 성질이 급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과부가 자기 집에 엘리야가 찾아온 것에 대해 이처럼 잘못된 해석을 한 것은 그를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엘리야가 그녀의 사려 깊지 못한 판단에 맞서 격하게 반응하는 대신 오히려 그녀의 분노를 돌리기위해 부드럽게 응대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설령 누군가가 우리에게 지각없이 말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그의 수준으로 내려가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엘리야는 그녀의 감정적인 질문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마 11:29), 그래서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는"(벧전 2:23) 분을 따르는 자임을 보여주었다.

"엘리야는 그녀가 극심한 절망에 빠져 있다는 것과 큰 고뇌에 빠져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그는 그녀의 말에 신경쓰는 대신 그녀가 자신의 중재를 통해 아들의 소생을 기대하도록 이끌면서 그녀를 향해 조용히 '네 아들을 달라' 고 말했던 것이다"(J. 심슨).

물론 여러분들 중에는 내가 위에서 인용한 말이 전적으로 추론에 의한 것이라고 여길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나는 그런 말들이 성경에 의해 충분히 보증된다고 믿는다.

히브리서 11장 35절은"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공동번역에는 이 구절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돌아오는 식구들을 만난 여자들도 있습니다"라고 되어 있다-역주)라고 말씀한다.

이것이 그 위대한 "믿음 장"에 나오는 말씀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거기에서 성령님은 우리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이 겪는 몇 가지 놀라운 일들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성령님은 이런저런 경우들을 언급한 후 그 모든 것을 하나로 엮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신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이런 언급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경우와 수넴 여인의 경우(왕하 4:17-23)에도 적용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신약 성경은 다시 한 번 구약 성경에 빛을 비춤으로써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문제에 대해 보다 완전한 개념을 얻게 해준다.

사르밧의 과부는, 비록 이방 여인이었지만, 하나님이 택하신 믿음의 사람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사라의 딸이었다. 그런 믿음은 불가사의한 믿음이다. 그런 믿음을 지으신 분과 대상 모두 불가사의하다.

우리는 이런 믿음이 언제 그녀 안에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아무 말씀도 듣지 못한다.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엘리야가 그녀의 집에 머무는 동안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롬 10:17) 나기 때문이다.

그녀의 믿음의 불가사의한 성격은 그 믿음의 불가사의한 열매를 통해 드러났다. 왜냐하면 그녀의 아들이 소생한 것은, 물론 엘리야의 중재 탓이기도 하지만, 일차적으로 그녀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한, 그 전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가 결코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한줌의 가루가 떨어지거나 소량의 기름이 마르지 않게 하셔서 그 세 사람이 "여러 날" 동안 먹고 살게 하셨던 분은 또한 그 죽은 자를 속히 살려내실 수 있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전능자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 역사적인 이야기 속에는 아들의 소생과 관련해 그 과부의 믿음을 보여 주는 암시가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그런 믿음과 반대되는 것만 있다며 반발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지적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위에서 살펴보았던 것과 어긋나지 않는다.

창세기에는 자신의 임신과 관련해 사라의 믿음을 언급하는 아무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의심에 대해서만 언급될 뿐이다. 출애굽기 어디에서 모세의 부모가 그들의 아들을 파피루스로 만든 궤짝에 실어 강물로 띄워 보낼 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발휘했다는 언급이 나오는가?

그럼에도 히브리서 11장 23절을 살펴보라. 사사기에서 삼손이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주장하는 구절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히브리서 11장 23절은 그가 믿음의 사람이었음을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구약 성경에서 그 과부의 믿음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나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엘리야에 대한 그 과부의 불친절한 말이 신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다.

사실 그것은 사라의 불신앙이나 욥의 조급함에 대한 기록 이상으로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이것은 그 과부의 그런 불친절한 말들이 어린 양의 피로써 깨끗하게 지워졌기 때문이리라.👍

Arthur W. Pink 엘리야의 생애 p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