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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eanings in Joshua 374] 실로에서의 작별(수 23:1-16) 본문

강해시리즈/여호수아 강해 (Gleanings In Joshua)

[Gleanings in Joshua 374] 실로에서의 작별(수 23:1-16)

En Hakkore 2025. 2. 5. 15:14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대표들을 실로에 불러 모은 목적은 나이 많은 베드로가 그 고귀한 믿음에 대해 성도에게 쓸 때에 가졌던 의도와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 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벧후 1:12-15).🪴

여호수아의 주요 관심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었고 그들의 안전이었다. 장로들을 부른 시점이 지극히 흥미롭다.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들로부터 이스라엘을 쉬게 하신 지 오랜 후에"(수 23:1).

여호수아가 쉬는 기간을 허락받았다는 것이, 곧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을 누렸다는 것이, 매우 고무적이다. 그는 많은 전투에 참여하고 싸웠고 이겼다. 가나안 땅을 분배하면서 어려움도 당했다.

아간 같은 범죄자를 사형에 처하는 일을 담당하기도 했고, 패배의 괴로움도 겪었고, 승리의 환희도 맛보았다. 그러나 드디어 하나님은 이 신실한 종에게 안식을 주셨고, 그와 더불어 온 민족에게도 안식을 주셨다.❤️‍🩹

히브리서에서 우리는 이 안식이 신자가 장차 하늘에서 누릴 안식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현재의 안식을 상징하는 것임을 배우게 된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히 4:6:9).

그러므로 신약성경에 비추어 이 가나안 땅에서의 안식의 사실들과 특징들을 살펴보는 것이 좋으리라 본다.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이 누린 이 안식이 하나님이 베푸신 것이라는 사실이 선명하게 나타나며(수 23:1), 또한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그 민족을 그 안식에로 인도하셨다는 사실 또한, 선명하게 나타난다(히 4:8).

더 나아가, 여호수아의 고별사와 그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의 상세한 사항들을 조심스럼게 읽어보면 이 안식이 그저 일시적이며 조건적인 것이었으며, 그 안식을 방해할 수 있는 여러 요인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가나안 땅의 여러 부분들에 아직도 그들을 대적하며 우상 숭배하는 가나안 족속들이 남아 있었다. 더욱이, 언제든 속히 발동하여 그 민족의 평화를 어지럽힐 수 있는 악들이 이스라엘 속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는 것을 비느하스 자신이 염려하고 있었다.

히브리서에 의하면, 가장 염려스러운 요소는 그들의 원수나 다른 인근의 부족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 자신에게 있었다.😰

"[그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히 4:6).

그리스도는 오늘날 모든 이에게 안식이시며 동시에 안식으로 인도하는 분이시다. 그는 죄인에게 안식을 베푸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는 성도에게도 안식을 베푸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9-30). 아멘!

죄인에게는 회심을 통해 안식을 베푸시고, 성도에게는 거룩히 구별하심으로써 안식을 베푸신다. 전자에 대해서는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히 4:3)라고 말씀하며, 후자에 대해서는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 4:11)라고 말씀한다.

히브리서 4장에 대한 해석이 강해자들마다 달라서, 어떤 이들은 거기서 말씀하는 안식이 현재에 경험하는 안식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이들은 그것이 충만하고도 최종적인 안식이요 영원한 안식을 지키는 것을 뜻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두 가지 면이 모두 회심 때에 시작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9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안식을 일곱째 날에 하나님이 안식하신 것(창 2:2)과 동일시하기 위해 그것을 헬라어로 "싸바티스모스"(안식)라 부른다. 그 안식은 무활동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노력의 완성, 수고의 중지를 의미한다.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첫 안식일의 안식조차도 사람의 죄로 인해 깨뜨려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영원한 안식의 모형일 수는 없다. 신자의 편에서 불순종하면 영혼의 고요함이 망가지는 것은 물론, 영혼의 고요함 대신 내적인 갈등과 고뇌가 생기게 된다.

Arthur W. Pink 여호수아 강해 p804

🌾 히브리서 4장 8-10.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