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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시리즈/산상수훈 강해 (Sermon on the Mount)

[산상수훈 258]

En Hakkore 2024. 7. 30. 14:06

거짓 선지자들 1(마 7:15)

'거짓 선지자들'의 일반적인 특징은, 그들은 지극히 중요한 경건은 실제보다도 덜 엄격하고 더욱 편한 것으로 만들어서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더욱 잘 적합하게 하고, 이로써 중생하지 못한 자로 하여금 참 은혜에 미치지 못하는 그 어떤 것에 만족해 버리도록 부추긴다는 사실이다.

바리새인들이 지극히 엄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하였였고(마 23:25), 천주교도들이 그들의 고행을 뽐냄에도 불구하고 이러하였으며,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도 선한 일을 행하고자 하는 표현상의 열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하다.

반율법주의자들(Antinomians) 또한 훨씬 더 많은 빛을 받고 기쁨, 열심, 확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하다. 이것이 모든 거짓 선생들의 공통적인 표시이다. 즉 하나님의 길을 거부하고 그들은 자신에게 알맞는 길을 꾸며낸다.

그리고 그들 각자는 서로 크게 다르다 할지라도, 경건의 행실과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성경이 가르치는 것보다 쉬운 것으로 만들고, 구원을 싼 값에 제시하며,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했던 것보다 문을 더욱 열어 젖혀 천국으로 가는 길을 더욱 넓게 하는 데 있어서는 모두 다 한 마음이 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사람들의 인기를 얻는 비결이다.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요일 4:5).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삼가라'고 자기 백성에게 경고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씀의 순전한 젖으로가 아니라 독으로써 영혼들을 먹이기 때문이다.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니라."

이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이 거짓 선지자들의 위험, 즉 그들은 방심한 자를 미혹하기 위하여 그들의 성품을 잘 꾸몄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주님은 여기에서 이전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참된 종들의 특이한 복장을 함으로써 선지자로서 가장하였던 방법을 언급하신 것이다. 그의 의복 때문에 엘리야는 '털이 많은 사람' 이라고 불리었다(왕하 1:8).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왔을 때에(눅 1:17) 그는 "약대 털옷을 입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마 3:4).

그 당시 사탄의 사자들이 참된 선지자들로 가장할 때에는 그들의 복장을 위조하여 백성들을 더욱 쉽게 속이려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이상을 각기 부끄러워 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며" 라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스가랴 13:4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다.

이것을 언급하심으로써 그리스도는 이교 선생들의 그럴듯한 겉치례, 즉 그들이 자신의 진짜 성품과 의도를 숨기려고 사용하곤 했던 속임수를 암시하신 것이며, 이로써 그들이 참으로 위험한 존재들이며 그의 백성은 그들을 멸망으로 이끌려고 애쓰는 자들을 끊임없이 경계해야 할 절박한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셨다.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은 그들의 진짜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취한다. 그들은 악한 자의 사자들이지만 거룩하신 분의 종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본거지는 변방, 곧 숲이나 산에 있으면서도 그들은 양 우리에 들어온다.

이것은 그들이 아주 교활하나 겉으로는 경건한 체하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사람들은 그들이 천국 가는 길을 가르쳐 주고 있다고 생각하나 실상 그들은 지옥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을 식별하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그들은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딤후 3:6)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도 시대에조차도 그들 중의 어떤 이들은 성도들의 회중에 성공적으로 "가만히 들어"갔다(유 4 절).

바울은 이들에 관하여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 13-15)고 말하였다. 그들은 '양의 옷'을 입었다 할지라도 이리처럼 포악하고 잔인하다.

그들이 아주 교활하고 교묘하며 또 흔히는 여기에 아주 매력적인 인품과 외견상으로 성자연하는 태도가 따르는 것 외에도, 그리스도인 자신 안에 이들의 거짓에 반응하고 찬동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 이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을 받고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들일 위험이 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욱 심각한 위험에 빠지게 된다. 아첨하는 것은 육을 즐겁게 하지만, 창피를 받는 것을 싫은 일이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바로 이 일을 불평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이 첫 번째 편지에서 그들의 죄를 질책하며 분명하게 말한 내용에 대하여 분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두 번째 편지에서 "원컨대 너희는 나의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11:1)고 말하고 있다.

갈라디아인들도 바울에게서 처음에는 복음을 몹시 기쁘게 받아들여서 그에게 유익이 되기만 한다면 자기들의 눈이라도 빼어주려 하였지만(4:15) 그들은 곧 유대화주의자들의 그릇된 사상을 흠뻑 흡수하여서 사도가 이 일을 꾸짖을 때에, 그는 그들에게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16절)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구세주께서도 이와 똑같이 당하셨다. 수많은 무리가 호산나를 부르며 그를 환호하였으니 일주일도 못 되어서 그들을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라고 외쳤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은 변덕스러우며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너희가 무엇을 듣든가 스스로 삼가라"(막 4:24)고 명령하신 것이다. 부패한 본성은 그릇된 사상을 아주 좋아하며, 그리고 참된 교리보다는 거짓을 더욱 쉽사리 열렬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어느 누가 우리의 이 진술에 대하여 의문을 표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렘 5:31)는 말씀을 들어 보일 것이다.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요 8:45)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야말로 타락한 인간 본성에 대한 논평이다. 그리스도께서 거짓을 전파하셨더라면 그들은 재빨리 그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슬프게도 인간은 바로 이런 존재인 것이다. 즉 그는 새롭고 놀라운 것은 탐욕스럽게 좇지만 복음의 옛이야기에는 곧 싫증을 느낀다.

Arthur W. Pink 산상수훈 p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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