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Exodus 369] 본문

강해시리즈/출애굽기 강해 (Gleanings In Exodus)

[Exodus 369]

En Hakkore 2024. 7. 5. 11:56

영화롭게 된 중보자 - 모세 1(출애굽기 34:28-35)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히 10:1)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한 아름다운 비유와 그 실례는 모세가 빛나는 얼굴로 산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출애굽기 34장의 하반절에서 볼 수 있다.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이 부분의 열쇠는 그것이 이 구속의 책에서 차지하고 있는 정확한 위치를 주목하는 가운데 발견된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합법적인 언약 다음에 오며, 성막을 실제로 세워 셰키나의 영광이 그곳에 가득 차기 전에 보인다.

이 구절들은 차후에 살펴보겠지만, 고린도후서 3장에서 해석되고 있다. 이 출애굽기 34장은 성령의 은혜와 더욱 풍성한 삶의 시대인 새 시대와의 비교와 대조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 시대가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하셨음과 사악한 피조물임을 알 수 있도록 율법 아래에서 충분히 시험을 받는 것이 적합하다고 보았다.

지난 장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모세의 통치 아래에서의 인간의 시도는 두 가지 사실을 나타내었는데, 첫째는 그들이 '불경건함' 과, 둘째는 그들이 '힘이 없다'(롬 5:6)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부정적인 일들로서, 로마서 8:7에는 인간의 두려운 상태에 대한 세 번째의 모습을 언급하셨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의 몸을 입어 이 땅에서 33년 동안 거할 때 여실히 증명되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11). 그렇게 한 것뿐만 아니라 그는 "인간들의 멸시와 거절함" 을 당하셨다. 그것뿐이었던가? 그들은 그를 미워하되 "이유 없이"(요 15:25) 그를 미워하였다.

그들의 증오심은 그를 범죄자의 죽음으로까지 정죄하여 저주 받은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진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일은 영광의 주를 죽인 것은 다만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그러했다는 것이다.

이러므로 주께서 그의 죽음을 미리 보시고,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요 12:31)라고 말했다. 이스라엘만은 아니었다. 여기에서 인간의 유예기간, 또는 시험을 끝났다. 인간은 지금 유예기간 아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저주 아래 있음이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도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인간은 시험 가운데 있지 아니하고, 그는 언도를 받은 죄인이다. 탄원이 소용없고 변호는 받아들여지지 아니할 것이다.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현재의 결과는 인간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결에 복종하라는 것이다.

복음이 우리를 만나는 것이 이곳이다. 그것은 "잃어버린 바 되었고", "경건치 못하며, 연약하고,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인 우리에게로 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가련한 죄인읳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고 선포한다.♥

그러나 죄인이 그에 대한 하나님의 언도에 복종할 때까지, 그는 그 은혜를 환영하지 아니할 것이다. 그것이 곧 죄인으로부터 회개와 믿음이 함께 요구되는 이유이다. 이 두 가지는 떨어져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행 20:21)을 증거하였다. 회개라 함은 죄인이 그가 처해 있는 정죄의 언도를 시인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에게 미친 은혜와 자비를 영접하는 것이다.

회개는 새로운 장을 넘기는 것이 아니며 나의 길을 수정하겠다고 맹세히는 것도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나에게 이르시는 말씀 곧 내가 '연약' 함으로써 스스로 절망적일 뿐만 아니라 "다음번에는 더 잘 할 수 있다"는 것도 전혀 가능성이 없음과, 다만 세상을 좇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정당하게 여겨, 그 위에 나의 인을 찍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진정으로 믿기 전까지는(나의 경험의 결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권위에 의하여) 참으로 그리스도께로 돌아와 - 돕는 자로서가 아니라 구세주로서 - 그를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세대주의적으로 그랬듯이, 실험을 통하여서도 그러하였다. 즉 생명 또는 "성령의 직분"(고후 3:8)이 있기 전에 "죽음의 직분"(고후 3:7)이 있어야만 했고, "의의 직분" 이 있기 전에 "정죄의 직분"(고후 3:9)이 있어야만 했다.

"정죄와 죽음의 직분" 은 우리 귀에 이상하게 들린다. 그렇지 아니한가? "은혜의 직분" 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지만 "정죄의 직분" 이란 파악하기 힘든 말이다. 그러나 이 후자가 인간에게 맨 먼저 필요한 것이니, 인간은 다만 긍휼에 빚진 자임을 깨닫기 전에 자신의 어떠함 곧 소망이 없는 곤고함, 거룩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요구에 부응하기에 전적으로 무능함을 알아야만 한다.♥

다시 반복하지만, 율법으로써 그러했던 것과 같이 실험적으로 무능함을 알아야만 한다. 다시 반복하지만, 율법으로써 그러했던 것과 같이 실험적으로도 그러하다. 즉 사도 바울이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라고 한 말씀은 이 사실(그 자신의 경험)을 두고 한 말이다.

그가 중생하지 못했던 날에는 스스로의 판단으로 '살았다' 고 하였으나, 오히려 그것은 "율법 없이" 한 것이요, 그 요구로부터 너무도 동떨어진 일에 불과했다. 그러자 "계명이 이르자".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심중에 능력으로 이르자. "죄는 살아났다" 고 하였다.

이는 그가 자기의 끔찍한 여건을 깨달아 그의 자기-의적인 만족함으로부터 "죽게 되어", 자기의 경우가 전혀 소망이 없음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하다. 영광을 입으신 중보자가 먼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법적인 언약 다음에 나난 것이다.

Arthur W. Pink 출애굽기 강해 p719

'강해시리즈 > 출애굽기 강해 (Gleanings In Exodu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odus 371]  (0) 2024.07.05
[Exodus 370]  (0) 2024.07.05
[Exodus 368]  (0) 2024.07.05
[Exodus 367]  (0) 2024.07.05
[Exodus 366]  (0) 2024.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