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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eanings in Joshua 349] 도피성(수 18장) 본문

강해시리즈/여호수아 강해 (Gleanings In Joshua)

[Gleanings in Joshua 349] 도피성(수 18장)

En Hakkore 2024. 11. 29. 20:47

"괴로움이 없을 때에는 사람들이 피난처로 도망하지 않는다. 바람과 파도가 모두 부드러울 때에는 배가 항구로 대피하지 않는 법이다. 성이 무너질 것이고 자신이 그 속에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으면, 마치 롯이 소돔을 떠난 것처럼, 사람이 성을 벗어나 피하지 않는다. 아, 과연 그렇다.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중에, 우리가 과거의 위험 속에 있었음을 고백한다. 형제 여러분, 위험이다. 이 단어가 약하다고요? 영원한 불에 탈 위험이다. 아니 그보다 더 심각하다. 우리는 불길에서 건져낸 말은 막대기들이니 말이다. 우리는 이미 죄의 불에, 곧 지옥 불에, 타버린 존재입니다(찰스 스펄전).

치명적인 위험 속에 있는 것과 -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한 것에 대한 정죄와 저주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이 그렇지만- 우리 영혼이 그런 사실을 느끼고 지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빛 속에서 자신의 추함을 보기까지 사람은 자기의 처지에 대해 만족을 느낀다.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의 눈이 떠져서 자신이 도덕적인 나병 환자라는 사실을 지각하기 전에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성품과 의로움에 대해 자부심을 버리지 않는다. 하나님이 진노가 그 자신이 지은 죄들로 인해 자신을 추격하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이 영원한 죽음에 빠지기 직전의 상황에 있다는 끔찍한 사실을 생생하게 깨닫기 전에는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안일한 처지에 있는 법이다.

그러나 여러분, 주목하시기 바란다. 살인한 사람이 자기 자신의 위험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는 혹은 하나님이 그를 위해 문제 해결을 해 주셨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반드시 도피성으로 피해야 하고, 그 곳을 보금자리로 삼아야 한다. 실제로 도피성의 문을 통과하기까지는 피의 보수자로부터 안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사정이 너무도 절박함으로, 그 성은 지체하지 않고 즉시 받아 주었다.

자기의 목숨을 아낀다면, 속히 그곳으로 피해야 한다. 꾸물거리거나 한가한 생각을 갖는다면, 이는 아직 자신의 위험을 진정 느끼지 못한다는 증거이다. 죄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죄에 대한 깨달음이 아무리 깊고 오랫동안 이어졌다 해도, 진정으로 자신을 그리스도께 맡기고 그분의 은혜로운 베푸심을 받아들이기까지 그는 버려진 영혼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든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 아래 있든지, 둘 중에 하나밖에는 없다. 둘 사이에 중간은 없다. 바로 지금 "벌써 심판을 받아"(요 3:18) 형 집행을 기다리는 것이든지, 사면을 받아서 결코, 복수를 당하지 않게 되었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살인한 사람을 사로잡은 괴로움이 그저 쉽사리 떨쳐버릴 수 있는 일순간의 공포를 훨씬 넘어서는 것-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괴로움이 깊어지는 것-이었던 것처럼, 금방 사라지는 일시적인 공포보다 훨씬 더한 괴로움이 있어야만 죄인이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게 된다.

"살인자는 그의 집과 아내와 자녀들과 모든 것을 떠나, 도피성으로 피했다. 은혜로 구원을 받기로 결심할 때에 사람이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자기 것이라 부르는 모든 것을 떠나고, 저희가 본성적으로 소유해온 모든 권리와 특권들을 다 내려놓는다. 그렇다. 자신의 본성적으로 받은 살아갈 권리를 잃어버렸고,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삶을 얻기 위해 피한다. 살인자는 도피성 내에 있는 것 외에는 삶을 얻을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공로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기는 모든 관념들을 마음으로 철저하게 영원토록 버려야 한다. 우리 자신으로부터 속히 벗어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피난처로 피한다는 것은 곧 사람이 자기 죄로부터 도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자기의 죄를 바라보며, 그것을 회개하는 것이다(스펄전).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던 과거의 삶과의 완전한 결별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감미롭고 달콤하게 만나기 전에 죄의 쓴 맛을 알아야 한다. 피난처를 찾아 도망한다는 것은 진지함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하는 살인자는 감히 꾸물거리거나 어슬렁거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지칠 줄 모르는 부지런함을 시사한다. 피난처에 도달하여 안전을 보장받기 전에는 결코, 꾸물거리를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죄를 깨달은 죄인은 바로이 점에서 극히 조심해야 한다. 사람에게 역사에서 그리스도께로 피해야 하는 절명의 임무를 거부하도록 만드는 데에 전혀 성공하지 못하면, 그 다음에 사탄은 최소한 그리스도교를 피하는 일을 최소한 뒤로 미루게 만들어 그 영혼을 망가뜨리려 한다.

심각한 질병에 걸리거나 나이 들어 유약해지고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워질 때에 회개하면 되니 최소한 그 때까지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쫓는 일을 뒤로 미루어 두고 이 세상의 것들을 가득 누리리라는 식의 유혹에는 많은 사람들이 - 영적 무관심에서 일깨움 받은 자들 중에서도 - 쉽사리 넘어가니 말이다.

그러나 그처럼 결단을 뒤로 미룬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떠밀리기까지는 회개하거나 믿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요, 또한 그들이 그리스도보다는 세상을 더 좋아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죄 가운데 있는 삶을 계속하며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허비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이런 절박한 임무에 합당치 않은 자들이라는 것을 더욱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자기들이 아직 충분히 죄를 깨닫지 못했으니 복음이 그들에게 합당하다는 것을 하나님이 더 충실히 확인시켜 주시기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또한 그들 자신을 "구도자"(求道者 :seekers)라는 잘못된 용어로 칭하면서 그들에게 주어진 은혜의 날을 잘못 허비하고 있다.

Arthur W. Pink 여호수아 강해 p7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