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시리즈/다윗의 생애 (Life of David)

[The Life of David 79] 시글락에 머뭄(사무엘상 27장)

En Hakkore 2024. 2. 20. 12:22

성경의 인물들에 대한 성령의 묘사와 세상 사람들의 전기(傳記)에 나오는 인물 묘사 사이에는 중요하 차이가 있다.

전자는 그 인물들의 실패와 좌절을 충실하게 그리면서 그들이 참으로 "우리와 성정이 같은"(약 5:17) 사람들임을 보여 준다. 반면에 후자는, 아주 드물게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 주인공들의 훌륭하고 호감이 가는 측면들만 기록하면서 그들이 인간이라기보다는 천사에 가까운 존재라는 인상을 심어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기들을 인색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특히 현대의 전기들은 거기에서 거론되지 않은 수많은 행간(行間)들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적절하게 조심하며 읽을 필요가 있다.

그래야 우리가 어느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그릇된 평가를 내리거나 자신에 대한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의 인물들을 실제와 진실의 색깔로 그려내신다. 그리고 그렇기에 우리는 "사람의 얼굴이 물에 비치듯이, 사람의 마음도 사람을 드러내 보인다"(잠 27:19, 표준새번역)는 것을 알게 된다.🤞

설교자와 청중 모두는 방금 지적한 내용의 실제적 중요성 - 그것은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탐구해야 할 요소다 -을 감안해 기독교적 경험에 대해 일방적인 개념을 갖지 말아야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는 무죄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죄는 성도를 완전히 지배하지 못한다. 성도 안에 "육"과 "영"이 모두 존재하기에 그는 "실수가 많다"(약 3:2). 그러나 그는 많은 일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도 한다. 비록 그리스도인은 "옛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사법적으로 이미 죽은 것으로 여겨야 하지만(롬 6:11), 그 옛 사람은 여전히 살아 있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활동 중에 있다.

그리고 그 옛 사람은 비록 하나님의 은혜가 그것이 아주 악한 모습을 하고서 터져 나오는 것을 억누를지라도, 우리의 내적 존재를 훼손하고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우리의 최선의 노력들을 더럽힌다(롬 7:14-25). 그럼에도 "새 사람" 또한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들을 이루면서 활동하고 있다.🤞

기독교적 경험의 이중성

우리가 기독교적 경험의 한 가지 측면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다른 측면을 무시하는 위험에 빠지는 것은 그 경험이 갖고 있는 이런 이중성 때문이다.

염세적 성향을 지닌 자들은 기독교적 경험의 어두운 측면에만 너무 골몰한다. 그런 이들은 시편의 마지막 부분들과 빌립보서 같은 책들을 무시하고 욥기나 예레미야 애가 같은 책들을 읽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쓰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과거에 어떤 이들은 인간의 타락과 그것이 성도 안에서 행하는 무서운 일들에만 베타적으로 관심을 두면서 우리 안에 존재하는 죄로 인해 지속적으로 신음하고 그것의 활동에 대해 슬퍼하는 것만이 높은 영적 경험의 징폐라는 생각을 퍼뜨렸다. 그런 이들은 슬플 때만 행복할 수 있었다.

나는 그런 가르침에 강하게 영향을 받은 이들에게 요한복음 14-17장을 자주 읽고 그 각각의 구절들을 그들의 기도와 찬양의 제목으로 삼을 것을 권한다.

반면에 낙천적인 기질과 낙관적인 성향을 지닌 자들은 성경의 선한 약속들을 이용해 성경의 명령들을 무시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들은 경박함과 피상성에 맞서기 위해 애쓰고, 생래적으로 주어진 풍성한 정신적 요소들을 영적 기쁨의 지속적이고 깊은 흐름과 혼동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늘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자신의 신분과 특권과 축복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 자신의 실제 상태와 의무와 실패들은 무시하는 것은 교만과 자기의(自己義)를 낳을 수 있다. 그런 이들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로마서 7장 히브리서 12장 전반부, 그리고 베드로전서 중 많은 부분을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로 물든 자아와 그로 인한 모든 비참한 실패에 충분히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자아를 넘어서고 우리의 영혼을 감사로 채우려면 그리스도와 그분의 위대한 구원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우리가 이제부터 살펴볼 다윗의 삶의 한 시기에 있었던 사건 때문이다. 그것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는 성도의 경험 혹은 삶에 대해 잘못된 개념을 갖는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다윗의 삶의 이 안타까운 실패에 주목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잘못에 대해 변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것을 통해 그 동일한 악한 본성이 우리 안에도 존재하며 또 우리 안에서 동일하게 악한 일을 낳고 있음을 깨달아 스스로 겸손해지기 위해서다.

그 시편 기자가 그렇게 행동한 것에 대해 놀라는 이들은 자신들의 마음이 갖고 있는 역병(疫病)에 대해 애처로울 만큼 무지하고, 거룩하신 분에게 다윗의 죄가 혐오스러웠던 것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혐오스로운 자신들의 죄악에 대해 눈이 멀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앞 장에서 우리는 불신앙과 두려움이 다윗을 사로잡았고 그로 인해 그가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삼상 27:1) 하고 말했던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불과 얼마 전에 그 동일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었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시 27:3). 그렇다. 우리들 역시 하나님과 긴밀하게 교제하고 믿음의 돛을 활짝 펴서 성령의 순풍을 가득 맞고 있을 때 그와 동일하게 말하거나 느끼지 않았던가?

아, 그러나, 설령 상황이 그랬을지라도, 어떤 새로운 시련이 닥쳐오면, 우리의 그런 확신은 곧 시들어버리고 결국에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지 않았던가? 우리는 이런 가슴 아픈 실패를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좀더 분명하게 보아야 하며, 주님 앞에서 좀더 참되게 자기를 낮추고 겸손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

또한 과거에 우리의 입술에서 나왔던 헛된 고백들로 인해 우리 자신을 좀더 크게 비난해야 한다!

앞에서 나는 "시련의 압박을 받는 사람은 가장 바라는 것은 그 시련에서 구조되는 것이다" 라고 지적했다. 아마도 여러분은 물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그렇다, 그러나 과연 그것을 영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른 모든 것에서도 그렇지만 시련에 처했을 때 우리가 무엇보다 바라야 할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불 속에서라도 여호와를 영화롭게"(사 24:15, grorify ye the LORD in thefires, KJV-역주)하기 위해 간절히 은혜를 구해야 한다.🤞

우리가 다음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우리의 영혼이 그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유익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는 주님께서 그런 고통이 우리에게 지속적인 선이 되게 해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그러나, 아, 불신앙이 우리를 지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잊고서 우리 자신의 상황과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일에만 정신을 판다.

또 우리는, 만약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잘못된 상태로부터 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구조되기를 바란다. 여기에서 다윗이 그렇게 했다. 그와 그의 사람들은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건너갔다(삼상 27:2).

Arthur W. Pink 다윗의 생애1 p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