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2024. 4. 11. 12:28

8. 회개의 성격(1)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3). 이 엄숙한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우리 각자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회개를 하나님으로부터 찾고 얻어야만 하며, 이것이 결핍된 그 어느것에도 만족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 지극히 중요하다. 그러므로 회개의 성격에 관하여 열심히 기도하며 부지런히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게 된다.

게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미혹을 당한다. 이 주제에 관한 서로 모순된 가르침 때문에 많은 사람이 당황한다. 그러나 이 사실로 인하여 실망하기보다는 더욱 열심히 성경을 상고하도록 고무해 주어야 한다. 이 주제에 관한 긍정적인 면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회개의 몇 가지 특성에 대해 지적해 보도록 하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설교를 듣고 두려움에 떠는 것은 회개가 아니다. 사실 크게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는 설교를 듣고도 무감동한 상태에 있으며 저주받은 자의 고통에 대한 설명을 듣고도 아무 공포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깊이 자극받고 놀람으로 가득차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으나 여전히 지옥에 갈 자들이 많이 있다.

마음을 찌르는 말씀을 듣고 완고한 사람들의 얼굴이 창백헤졌다가도 그 다음 날이 되면 그 말씀의 효과가 사라지는 것을 나는 종종 보아왔다. 벨릭스는 바울의 설교를 듣고 "떨었다"(행 24:25). 거의 설득되어지는' 것은 회개가 아니다. 아그립바(행 26:28) 가 그 좋은 예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종의 메시지에 완전히 동의하고 복음을 찬미하고 그리고 더 나아가 말씀을 기쁘게 받으나 결국ㅇ는 돌밭에 떨어진 씨앗과 같은 청중이 될 수도 있다(마 13:20,21).

그럴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악행을 의식하고 그것을 인정할지도 모른다. 바로는 "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듣죄하였다"(출 10:16)라고 인정하였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요구에 자신을 굴복시키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설득되어지는' 그 이상은 결코 되지 못한다.

하나님의 강하신 손 아래 자신을 낮추는 길은 회개가 아니다. 사람들은 깊이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고 집에 가서 자신의 생활을 개혁시키리라고 결심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죄의 무더기로 다시 돌아온다. 이 경우의 엄숙한 본보기는 아합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이스라엘의 사악한 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몹시 탐을 내어 그것을 얻기로 작정하고 그를 죽이게 함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다. 그러자 하나님의 종이 그를 만나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고 말하자 "그는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행보도 천천히 하였다"(왕하 21:27-29). 그러나 바로 그 다음 장에 보면 그는 다시 하나님께 반역하였고 마침내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 한동안은 자신을 겸손히 낮출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탐욕의 노예로 남아있을 수도 있다. 당신은 지옥을 두려워하면서도 계속 죄짓기는 두려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일 지옥이 없다고 한다면 많은 교인들이 회개도 그렇게 될 것이다. 다가올 진노를 두려워한다고 하여 그것이 바로 죄에 대한 거룩한 증오와 공포라고 혼동하지 말라.

죄를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회개가 아니다. 수많은 사람이 '제단'이나 '참회좌석'에 나아가 자신의 죄악을 길게 하나하나 늘어 놓으며 하나님께 자신이 얼마나 사악한 피조물이었는지를 말한다. 그러나 자신의 죄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그 죄에 대한 거룩한 증오와 불꽃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 결과가 이것을 보여주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전과 꼭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만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죄에 대항하지 않고 그것에서 돌아서지 않는다면, 당신이 꿈꾸었던 회개는 단지 속임수, 즉 꾸미기만 하는 그림물감일 뿐 금으로 변형시키는 은혜는 아닌 것이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면서도 회개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을 수도 있다. 어떤 죄인은 자신의 행악의 길을 깨닫고 그것에서 돌아서서 자신이 끼쳤던 손해를 보상하기 위하여 멀리까지 나아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멸망해 버리고 만다. 이 경우에 대한 분명한 증거는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다.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들의 돈을 돌려주고 나서(마 27:3-5), 그 사악한 자들의 면전에서 물러나왔다. 그는 구원되었는가? 아니다. 그는 밖으로 나와 목매어 자살했다. 이것은 얼마나 우리 각자를 떨게 하며 우리의 마음을 살피게 하는 일인가!

Arthur W. Pink 영적인 구원 p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