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구원 18] 중생의 효과
4. 행위의 교정(3)
"은혜 안에서" 자란다는 말은 "...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벧후 3:18)라는 말씀 속에 그 전체적인 뜻이 명백히 드러나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가련한 죄인들에게 완전히 적합한 분이라는 사실을 점점 더 깨닫는 것이며, 성령께서 날마다 나에게 가르쳐 주시는 바와 같이 사악한 죄인인 나의 구주로서 그리스도가 적합하다는 확신을 깊게 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정결케 할 그리스도의 값진 피와 내가 입게 될 그리스도의 의와 나를 지탱하여 줄 그리스도의 팔과 하늘에서 나를 구원하여 주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내가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땅에서나 하늘에서 현세에서나 영원의 세계에서나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성령께서 내게 드러내 보여 주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은혜 안에서 자라난다는 것은 자아의 오부에서 살게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살아 가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필요에 대한 공급을 주님께 의지하는 것이다. 그의 마음이 그리스도께 지배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의 마음의 심지가 더 견고하여 주께 머무르고(사 26:3), 믿음과 소망과 인내와 온유함과 모든 영적 은혜가 더 강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실천하고 행동하게 된다.
은혜와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나는 것과 그것의 표현은 다르다. 즉 성장하는 실제 과정을 육체나 영적 영역에서 알아볼 수 없으며, 그 결과만을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다. 뚜렷한 성장의 시기가 있으며, 그리고 일반적으로 영혼이 여러 가지 유혹 때문에 고통당하고 우리 안에 있는 죄 때문에 애통해 하는 동안에 그리스도의 영적 은혜는 가장 커진다.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열매가 성숙해지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와 교통하심을 알고, 그리스도의 온전하심을 양식으로 할 때이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의 주된 증거들은 죄를 더욱 더 증오하고 자아를 혐오하며 영적인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두며 그것을 간절히 바라며 우리의 결핍을 더 깊이 깨닫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하나님께 의지해야 함을 더 깊이 깨닫는 것이다.
중생은 모든 중생자에게 있어서는 본질적으로 똑같다. 영적인 변화가 있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 영혼이 닮아간다.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다"(요 3:6). 그러나 비록 중생한 자가 새로운 피조물이고, 그의 존재의 모든 기능 위에 역사하는 믿음과 거룩한 원리를 받아들이고, 성령이 그 안에 거하시고 이끌어 주신다 하여도 하나님께서는 똑같은 분량의 은혜를 주시지 아니하시며(롬 12:3; 고후 10:13; 엡 4:16), 모든 사람에 모두 같은 재능을 주시지도 않는다.
자연적으로 출생한 어린 아이들이 각각 다른 것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도 서로 다르다. 그들 중 어떤 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활기차고 강하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어떤 이에게는 더 많은 지식을 어떤 이에게는 강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더 온화한 사랑을 주실 것이다.
'영'의 나타남이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형태나 특성은 우리의 타고난 기질과 많은 관련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상태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즉 그들 모두에게 똑같은 일이 이루어지고 이런 것들이 그들을 세상 사람들로부터 구별하여 준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전 6:2) 이 말씀은 성도들이 세상 사람과는 전혀 다른 거룩하고 구별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을 뜻하고 있으며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가? 현재 헛되이 주의 이름만을 가지고 있는 자는 그의 이름을 더럽힌 자들을 심판할 수 있는 자리에 어찌 앉을 수 있겠는가?
자신을 즐기기 위해 사는 자는 하나님보다 쾌락을 위해 사는 자를 심판할 수 있겠는가? '청교도적인 엄격한 생활'을 경멸하고 비웃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반역하는 인간에 대한 심판자로서 그리스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까?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다. 그날에 그들은 타인의 심판자로서가 아니라 악인으로서 저주를 받고 박해받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니이다"(시 84:11). 은혜와 영화는 서로 분리할 수 없다. 즉 그것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본질은 꼭 같다. '은혜'는 '영화'의 시작이다. '영화'는 은혜가 그 절정에 달하고 완전히 이루어진 상태이다.
요한일서 3:2에는 성도들은 "그와 같게" 될 것이며, 그리고 그것은 "그이 계신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라고 쓰여 있다. 주님의 영광을 직접 봄으로써 변화될 것이며, 하나님의 순전하심과 거룩한 밝은 빛이 영광받은 자에게 비춰질 때 그들은 완전히 거룩하고 복 있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하나님을 닮은 모습은 하나님의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이미 어느 정도는 지니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의 어떤 특징들이 성도들에게 새겨지는데 이것 역시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비유적으로 말해서) 거울을 통해 희미하게 보는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한 단계에서 또 다른 단계로)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0)
나와 여러분이 다같이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시험하고 발견하여보자. 죄에 대해 우리는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가? 내가 죄에 굴복한 후에는 깊은 수치심으로 경건하게 애통해 하는가? 죄를 정말 싫어하는가?
세상에서 '사소한 과오'. '사소한 일'이라고 부르는 것 때문에 내 마음의 평화가 깨어질 만큼 내 양심은 예민한가? 나의 자만과 나의 의지가 생기는 것을 의식할 때 자신을 낮추는가? 나는 나의 내부의 부패를 증오하는가? 내 마음은 항상 무엇을 즐거워하고 있는가? 나는 영적 의식(儀式)들이 즐겁고 유쾌한가, 아니면 지루하고 짐이 되는가?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의 꿀보다 더하니이다"(시 119:103)라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가? 최고의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소중한가?
Arthur W. Pink 영적인 구원 p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