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99] 이삭을 제물로 바침
이스라엘의 이후 역사(歷史)에 대한 이러한 놀라운 개요에 이어 무엇이 따르는가? 그것은 창세기 22장의 모리아 사건 즉 구주의 죽음과 부활을 가장 놀라운 방식으로 예표하는 사건이다.
그러면 두 가지가 함께 연결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 그리고 나중에 유대인들에게 - 이스라엘의 천년왕국의 축복이 어린 양의 보배로운 희생제사로 말미암은 것임을 보이기 위함이다.
이제 창세기 21장에 대한 시대적 적용은 여기에서 멈추고, 그것의 개인적인 적용을 한 번 더 고찰해 보도록 하자. 이전 글에서 우리는 이삭의 탄생이 일곱 가지 측면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표하는 모형임을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모리아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어떻게 갈보리의 십자가를 가리키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창세기 22장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성도들이 항상 좋아하는 이야기였다. 모리아 이야기를 좀 더 상세히 살피기에 앞서, 먼저 우리는 여기의 사건이 구약에서 하나님의 인신제물(人身祭物)을 요구하신 유일한 경우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처음으로 죄를 제거하기 위해 사람을 희생제물로 드릴 필요가 있음을 계시하셨다.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신적 공의가 만족되기 위해서는 동물이 아니라 사람을 희생제물로 드릴 필요가 있었다.
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이것은 우리 앞에 아들 하나님뿐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보여 주는 구약의 매우 드문 모형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이 나타나는 것과 갈보리의 신적 측면이 놀랍게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또 여기의 모형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것을 발견한다(롬 8:32).
진실로 바로 이것이 창세기 22장의 핵심이다. 여기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이삭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다. 이삭은 단순히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으로만 나타날 뿐이다. 여기에서 가장 강렬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버지의 마음이다.♡
2.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3절).
여기의 모형 속에서 우리는 아버지가 아들을 희생제물로서 따로 두는 것을 발견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어린 양을 잡기 전에 그것을 다른 가축 떼로부터 나흘간 따로 두어야만 했다(출 12:3). 그와 같이 여기에서 이삭을 제단에 드리기 사흘 전에 아버지 아브라함이 따로 취했다.
이것은 우리 앞에 지극히 보배로운 진리를 제시한다. 주 예수의 십자가는 까닭 없이 그를 미워한 자들의 광분한 행동 훨씬 이상이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심"에 따른 것이었다(행 2:23).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은 단지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했을 뿐이었다(행 4:28). 그리스도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된"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이었다(벧전 1:20). 그렇다. 주 예수는 영원 전부터 희생제물로서 따로 구별되었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서, 그는 "창세로부터 죽임 당한 어린 양"이었다(계 13:8). 그러한 사실이 여기의 모형 속에 암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주목하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3.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5절).
여기의 모형 속에서 우리는 희생제사가 드려지는 산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계약이 맺어진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여기의 모형 속에서 그러한 사실을 나타내기를 원하셨다. 창세기 22장에서 사라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 앞장과 뒷장 즉 21장과 23장에서는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직 아브라함과 이삭만 나타나야만 했다. "두 종" 도 아브라함과 이삭을 따라 산 밑에까지 왔다(22:3). 그러나 희생제사가 드려지는 장소에는 오직 아브라함과 이삭만 있어야 했다(5절). 아브라함과 이삭을 두 종이 산 밑에까지 따라온 것은 별 의미 없는 일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둘은 증인의 숫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여기의 두 종은 나무를 지고 산으로 올라간 이삭은 보았지만, 제단에서 그와 그의 아버지 사이에 일어난 일을 보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다. 아무도 그것을 보아서는 안되었다.
이제 원형을 바라보다. 여러분은 거기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가? 두 강도는 갈보리까지 그리스도를 따랐다. 그러나 그러나 다른 모든 구경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도 제단 위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일어난 일을 보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세 시간 동안의 캄캄한 어둠이 모든 사람의 눈으로부터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계약을 가렸다.
4.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6 상반절).
이삭은 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이미 충분히 자란 청년이었다. 그는 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늙은 아버지에게 저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삭은 저항하는 대신 조용히 아버지를 따른다. 그는 저항의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자신의 어깨에 나무를 지고 묵묵히 순복한다. 여기에 아버지의 뜻에 묵묵히 복종하는 우리 구주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가!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가 그의 즐거운 외침이었다(히 10:1). 또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라는 말씀 속에 그의 마음의 온전함이 충분하게 나타났다(시 40:8).
그리스도와 아버지는 완전하게 일치되었다. 이것이 창세기 22장의 모형 속에서 어떻게 아름답게 나타나는지 보라.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6절). 또 다시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8절). 그리고 여기의 "나무"를 짊어진 이삭이 십자가를 짊어진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
Arthur W. Pink 창세기 강해 p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