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시리즈/다윗의 생애 (Life of David)

[The Life of David 221] 도망(사무엘하 15장)

En Hakkore 2024. 3. 2. 12:26

아히도벨이 배반한 이유

이 질문에 답하려면 성경을 잘 검토하고 거기에 실린 구절들을 신중하게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사무엘하 23장 후반에는 다윗의 시위대(23절)를 구성했던 삼십 칠 명의 명단이 나온다. 그들 중에서 우리는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압"(34절)과 "헷 사람 우리아"(39절)이라는 이름을 발견한다.

엘리압과 우리아는 모두 장교였고 함께 일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아가 엘리압의 딸과 결혼했다는 사실(삼하 11:3)에 놀랄 필요는 없다. 또한 그러므로 다윗이 극악할 정도로 부당하게 손에 넣은 밧세바는 아히도벨의 손녀였고, 다윗이 그토록 잔인하게 살해한 우리아는 그의 손녀사위였던 셈이다!

바로 이 사실이 어째서 다윗의 "가까운 친구"(시 41:9)가 그의 치명적인 적이 되었는지, 그리고 어째서 그가 기꺼이 압살롬을 도우려 했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는 자기 집안이 당한 불명예스러운 일에 대해 복수하려 했던 것이다!

아히도벨의 집안에 그런 불명예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나서 몇 해가 지나갔다. 그 기간 동안 그는 다윗과 왕궁에 대해 등을 돌리고 조용히 그의 성읍으로 물러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삼하 15:12).

다윗이 자기 집안에 행한 극악무도한 잘못 때문에 그의 마음은 복수심으로 사무쳤다. 압살롬은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따라서 아히도벨이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고 다윗에게 복수할 적당한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압살롬이 그토록 확신을 갖고서 그에게 접근하고, 그에게 자신의 반역 계획을 털어놓고, 그가 그 소식을 반기고 자기편이 되리라고 믿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 아닐까? 또한 바로 그것이 어째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간음과 살인으로 더럽혀진 왕 대신 반역하는 왕자에게 충성을 보였는지를 설명해 주지 않을까?

징계에 대한 순응

그러나 아히도벨과 밧세바의 혈연관계는 그가 기꺼이 왕에게 맞서서 압살롬의 편을 들고 일반 백성들이 왕 대신 왕자에게 충성을 보였던 이유만 설명해 주는 게 아니다. 그것은 또한 이 무렵에 다윗이 보였던 태도와 행동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도 제공한다.

다윗에게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죄 때문에 자기를 처리하고 계시다는 추가적인 증거였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의 징계의 회초리에 그토록 유순하게 자기 몸을 내맡기고 있음을 보는 것은 복된 일이다.🫰

다윗은 자기가 압살롬과 맞서는 것은 여호와와 맞서는 것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병력을 강화하고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 대신 도망쳤다. 우리는 이때 성령께서 다윗의 마음 안에서 맺어 놓으신 사랑스러운 열매를 귀하에 여겨야 한다. 즉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사건을 인간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촉발된 것으로 여겨야 한다.

훨씬 앞에서 우리는 다윗이 "의로 인해" 고통을 당하면서 보여 주었던 아름다운 마음을 귀하게 여겨야 할 이유에 대해 살펴본 바 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가 "범죄함으로 인해" 고통당하면서 그와 동일한 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을 본다.

그때 즉 사울이 통치하던 시절에, 우리는 매일 사울에게 쫓기면서도 정작 복수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해치지 않음으로써 자기 안에 온유함과 인내와 하나님에 대한 확신의 열매를 보여 주는 "순교적" 다윗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참회자" 다윗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는 자신의 죄를 깨달았고 하나님 앞에서 그 죄를 기억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순종하는 자세로 머리를 조아리고 자신의 잘못의 결과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은 다윗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솜씨를 다시 한 번 아름답게 드러낸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소란스러운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반역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문제를 자기 손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생래적 갈망을 없애 주실 수 있다. 또한 오직 그분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 아래에서 겸손해지게 하고, 우리의 죄를 "회초리로"(시 89:32) 다스리면서도 여전히 우리의 평안을 유지시켜 주실 수 있다.(큰소리로 아멘!😊)

그렇다, 내가 이 장을 열면서 말했듯이, 서로 다른 은혜가 나타나 작용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끊임없이 변하는 우리의 상황이다. 어떤 은혜는 활발하고 적극적이다. 그러나 다른 은혜는 수동적이기에 그것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아주 다른 환경이 필요하다.

전투에 임하는 군인에게 필요한 자질들은 그가 병상에 누워 수척해져 가고 있는 동안에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 영적 기쁨과 거룩한 슬픔은 각각 동등하게 아름답다. 신랑이 있는 동안 슬퍼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 일이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겼을 때 신방 주변에 모여 있던 자들이 금식하는 것은 아주 적절한 일이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과 매서운 서리의 습격을 당하지 않은 땅에서는 자라지 못하는 채소와 과일과 꽃들이 있는 것처럼, 오직 극심한 시련과 문제와 고통이라는 토양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성령의 열매들도 있다.

Arthur W. Pink 다윗의 생애2 p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