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2025. 6. 24. 15:57

주님이 먹이시리라

이제부터 엘리야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환경과 조건하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살펴보자.

지금까지 우리는 엘리야의 공적 처신(그가 아합 앞에서 어떻게 용기와 영적 위엄을 보였는지)과 사적 처신(그가 어떻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 그릿 시냇가에서 숨어 살면서 주님의 다음 명령을 기다렸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제 성경은 우리에게 엘리야가 사르밧에 있는 과부의 집에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말씀한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종과 백성들에 대한(현재 그들이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은혜의 충분성을 잘 보여 준다.

아, 안타깝게도 공적 생활에서 실패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은 엘리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언급한 부분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명이 필요하다.

종종 하나님의 종들이 강단이나 골방에서보다 집안에서 잘 행동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첫째, 그들은 공적 직무를 수행할 때 마치 그들의 대적인 마귀와 맞서 싸우듯 긴장한다. 그러나 그렇게 잔뜩 힘을 쓰고 난 후 집으로 돌아오면 긴장이 풀린다. 그때 그들은 아주 사소한 일로도 쉽게 흥분하거나 짜증을 낸다.

둘째, 공적 사역을 할 때 그들은 자신들이 마귀의 세력과 싸우고 있음을 인식한다. 그러나 집에 있는 동안 그들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이고 많은 보호를 받기에 사탄이 그들과 가까운 사람들을 사용해 그들을 지배하려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

셋째, 공적 생활에서 의식적으로 충성된 삶을 사는 것이 그들의 교만을 자극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육체의 가시"(고후 12:7) - 가정생활에서의 실패에 대한 고통스러은 인식 - 는 그들을 겸손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강단에서는 훌륭한 선포를 하면서 가정생활에서는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만드는 행동은 어떤 식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앞장에서 우리는 엘리야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그릿 시냇가를 떠나, 광야를 가로질러, 하나님이 비밀리에 그를 공궤하라고 명령하신 어느 과부가 살고 있는 성문에 제 시간에 도착했다는 것까지 살펴보았다.

엘리야는 성읍 입구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아주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 과부는 엘리야를 기쁘게 환영하기는커녕 슬픈 목소리로 자신과 자신의 아들들에게 다가와 있는 죽음에 대해 말했다.

그녀는 엘리야를 공궤하기에 충분할 만큼 많은 것을 갖고 있기는커녕 자기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통에 가루 한 움쿰과 병에 기름 조금뿐"(왕상 17:12)이라고 말했다.

이 얼마나 큰 믿음의 시험인가! 하나님의 사람이 그런 과부에게서 공궤 받기를 기대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비이성적으로 보이는가!

이것은 노아가 비를 내리기도 전에, 그리고 홍수에 대한 아무런 징조도 없던 때에 방주를 만들라는 요구를 받았던 것만큼이나 비이성적으로 보인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해서 여리고 성벽 주위를 돌라는 요구를 받았던 때만큼이나 비이성적으로 보인다. 순종의 길은 믿음을 보이고자 하는 사람이 걸어야 할 유일한 길이다.🤎

Arthur W. Pink 엘리야의 생애 p111

🌳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