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eanings in Joshua 385] 여호수아의 고별사(수 24:1-33)
2.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역사를 조감함
우리는 세겜의 이 모임의 실제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여호수아가 과연 그의 말이 모두에게 들리게 할 수 있었는지, 아니면 그가 장로들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각 지파에게 전달하게 했는지는 우리의 목적상 별로 중요하지 않다. 골짜기의 음향 효과는 상당히 좋기 때문에, 사람의 음성이 좋은 환경에서 놀라운 효과를 낼 수도 있다.
한 번은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가 이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 군중들 앞에서 노천 설교를 했는데, 벤자민 프랭크린(Banjamin Franklin)이 그의 음성을 편안하게 들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
우리의 주요한 관심사는 거기서 말씀한 여호수아 자신에게 있다. 그의 첫 마디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메시지의 실질적인 근원이 거기서 암시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이 장을 여호수아의 고별사라 부르지만 문자 그대로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주신 말씀이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수 24:2).
이 위대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그저 하나님의 입술일 뿐이었다. 여기서 여호수아의 전임자인 모세의 주저하는 모습을 기억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대중 앞에서 말할 능력이 없음을 호소한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알지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출 4:10-12).
그로부터 사십 년 전, 모세는 자신의 설득력이 도무지 효과가 없음을 배운 바 있다. 그는 분명,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출 2:14)라는 동료 히브리 사람의 대꾸를 떠올렸을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이는 인간이 기울이는 수고와 노력이 허사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분의 종에게 얼마나 은혜를 베푸셨는지!
무엇보다도 그가 입으로 말하는 것이나 눈으로 보는 것이나 귀로 듣는 것 등, 인간의 감각의 모든 기능과 역량을 다 알고 계심을 모세에게 확실히 알려주셨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마음에 가득한 두려움을 가라앉히시며,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고 말씀하셨다.
여호수아는 십중팔구 그런 두려움과 소심함을 경험한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의 첫 마디에서 우리는 여호수아가 하나님이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고자 그 자신을 그저 입술로 사용하실 뿐임을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모세는 무기력한 느낌에 사로잡혔고, 예레미야는 자신이 어리다는 의식에 빠져있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렘 1:6).
아마도 이미 사십오 세가 되었을 것인데도, 예레미야는 자신의 부족함과 무경험을 슬퍼했다. 모세의 경우 능력이 이미 그에게 있었으나 아마도 그 능력을 일깨울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모세는 하나님이 이미 그에게 주셨던 능력을 사용하도록 부추김을 받았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경우는 여호와께서 손을 뻗으사 그의 입에 대시고,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 1:9)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이 능력을 베푸신 사실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니엘에 대해서도 비슷한 언어가 사용된다. 그는 입이 닫히고 입술에 인을 받는 경험을 했다. 다니엘은 이렇게 쓰고 있다.
"인자와 같은 이가 있어 내 입술을 만진지라 내가 곧 입을 열어 내 앞에 서 있는 자에게 말하여"(단 10:16).
주의 종이 모세의 경우처럼 무언가 잠재된 능력이 거룩히 일깨움을 받든지, 예레미야의 경우처럼 특별한 능력을 부여 받든지, 혹은 다니엘의 경우처럼 잃어버린 능력이 회복되는지 간에,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간섭과 개입의 결과인 것이다.👌
그렇게 능력을 힘입을 때에야 비로소 선지자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라고 쓸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의 경우도, 주께로부터 그런 역사하심을 경험한 후에야 비로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고전 7:10)라고 쓸 수 있었다.
이 과거의 거룩한 사람들이 입술과 인격에 신적인 영향력이 가해지는 것이 필수적이었다면, 오늘날에는 그런 일이 얼마나 더 필요하겠는가!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같이 하고"(벧전 4:11). 아멘🕊️
Arthur W. Pink 여호수아 강해 p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