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eanings in Joshua 384_장문] 여호수아의 고별사(수 24:1-33)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선지라"(수 24:1).
오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권위에 여전히 굴복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에도 그 장로들이 살아 있는 동안 줄곧 그런 자세를 견지했다(수 24:31). 그러나 그 후 무법과 우상 숭배가 그들의 마음에 침투해 버렸다. 그리하여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이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17:6; 21:25).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그분의 계시를 가벼이 여기는 자세가 팽배해짐으로써 신정정치에 대한 소망이 이스라엘에게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사사기에 기록된 서글픈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탈선은 징계로 이어지고, 징계는 부분적인 교정을 가져왔을 뿐이다. 방지 장치들이 개입되긴 했으나 영적 쇠퇴가 계속 되풀이 되어갔고, 급기야 엘리 제사장의 며느리가,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삼상 4:21)라고 외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여호와께서 그분의 임재를 물리치고 그분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어리석음의 결과를 직접 당하게 하신 것이다.
교회 역사상 라오디게아의 시기와도 같은 이때에, 주께서 문밖에 서서 개개인에게 호소하시는 것 같은 이런 때에, 사람들의 의지가 움직여 하나님의 권위에 굴복하고 마음이 진리의 성경을 받아들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아멘🌍
일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사도와 선지자의 은사는 영원히 지나갔으며 그 직분들이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에 전혀 중요한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믿음이 있다. 사실이다. 그런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영원히 영광에로 들어갔고, 따라서 다른 세 가지 은사들(복음 전도자, 목사 그리고 교사)과는 달리 한 세대에서 그 다음 세대로 전수되는 것이 아니었다.
위대한 전도자가 죽으면, 하나님은 또 다른 전도자를 일으키신다. 한 목사나 교사가 소천하면, 이 은사들은 다른 이에게 베풀어진다. 그러나 사도와 선지자의 두 중요한 은사는 그렇지 않았다.
초기 교회에서 이 사람들은 특별한 사역에 합당했고, 그 사역은 완수되자, 그들은 교체된 것이 아니라 사라졌다. 전도자와 목사와 교사는 분명히 계속 계승되었으나, 사도와 선지자는 그렇지 않았다.
이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는 성경적인 명확한 안목을 견지해야겠다. 사도들 자신은 영원히 상급에로 들어갔으나, 그들이 남긴 권위 있는 글들이 우리에게 있다. 이 글들 속에서 사도들이 능력으로 권위 있게 말씀하시는 바를 여전히 듣는다.👍
오늘날에는 예컨대 사도 바울처럼 권위를 지닌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처럼 권위를 지닌 사람만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씀할 수 있었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권위의 상징)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고전 4:21).
바울에게(물론 다른 모든 사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부여된 신적인 권위는 그의 죽음과 함께 종결된 것이다. 사도들이 일시적인 권위를 소유했던 것과는 달리, 그들을 통해 영감으로 말미암아 기록된 성경은 영구한 권위를 소유한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1).
신약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의 교회에게 그 옛날 사도 시대의 모든 권위를 지닌다. 사도의 글들에는 신약성경의 신적 권위를 강조하는 네 가지 중요한 동사들이 있다. 곧 "명령하다"(to command), "당부하다"(to charge), "정하다"(to ordain), "뜻하다"(to will)가 그것이다.
물론 다른 동사들도 있으나, 이것들만으로도 우리의 논의를 위해 족하다. 이 동사들이 모두 똑같은 의미와 힘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 힘은 위에 언급된 순서로 점점 약해진다. "명령하다"는 복종을 요구한다.
이 동사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의 사도들의 말씀과 연관되어 사용된다. 바울과 베드로 모두 이 동사를 사용한다. 바울의 명령들은 가정 내의 문제들(고전 7:10), 공적인 사역(고전 14:37), 교회의 교제(골 4:10), 그리고 개인의 거룩한 처신(살전 4:2) 등에 관해서 베풀어진다. 베드로는 모든 사도의 사역 전체와 관련해서 이 단어를 사용한다(벧후 3:2).
세상에 만연되어 있는 무법한 자세가 흔히 주의 백성들의 회중에게 침투한다. 그런 자세는 권위에 대해 분개하고 모든 명령을 거부한다. "당부하다" 라는 동사가 앞의 것보다 힘이 약하기는 하나, 그럼에도 이 역시 책임을 부과하는 의미를 지닌다. 바울은 그 스스로 이를 행한 것은 물론, 디모데에게도 똑같이 행할 것을 위임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장로들에게 그의 서신을 교회 전체에게 읽어줄 것을 당부했다(살전 5:27, 개역개정은 이를 "명하다" 로 번역함. 역주). 그는 디모데에게 장로의 자격요건들에 관한 자신의 교훈을 지킬 것(딤전 5:21)과, 도덕적인 표준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것(딤전 6:13-14)과, 그리고 주께로부터 받은 바 사역을 행할 것(딤후 4:1) 등을 당부했다(개역개정은 이 본문들에서도 "명하다"로 번역함. 역주).
"정하다" 는 일정한 권위로 어떤 일을 지정하거나 조정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정하거나 지정한다는 뜻을 지닌 이 동사는 주께서, 그분의 사도들이, 그리고 특정한 사도의 특정한 대리인들이 사용했다.
바울은 혼인 관계(고전 7:17), 고린도 교회 내에 존재하는 특정한 악행들(고전 11:34), 그리고 감독들(딛 1:5)과 관련해서 이 단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디아서에서 이 단어를 사용했고(행 14:23), 예루살렘에서 장로들과 사도들과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관련해서 이 단어를 사용했다(행 15:4).
마지막 동사인 "뜻하다" 는 네 동사 중 의미가 가장 약하나, 확신의 결과로 어느 쪽을 선택한다는 관념을 표현한다. 바울은 남자들이 공적으로 기도해야 하며(딤전 2:8), 젊은 여자가 혼인해야 하며(딤전 5:14), 또한 신자들이 선한 일을 힘써야 한다는 것(딛 3:8)을 단정적으로 제시할 때에 이 단어를 사용한다.
예수님은 로마 백부장이 다음과 같이 겸손히 말하는 것에 놀라셨다.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눅 7:8).
다른 이들에게 명령할 수 있는 권위가 그에게 있었으나, 그 역시 더 높은 권위에 복종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사도들이 권위로 명령하고, 당부하고, 정하고, 뜻했으나 그들 역시 그리스도의 지극한 권위 아래 있었다는 점을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로마 백부장의 권위가 그의 상관의 권위의 표현에 불과했듯이, 이 거룩한 사람들의 글들에서 표현되는 신적인 권위도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절대적인 권위가 그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권위를 최고의 권위로 알아 순종해야 한다. 아멘!
주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역사로부터,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라는 교훈을 배우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Arthur W. Pink 여호수아 강해 p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