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eanings in Joshua 358] 레위지파의 성읍들(수 21:1-45)
하나님을 존귀하게 하는 이 레위인들이 그들의 주장을 은밀하고도 사사로이 하지 않고 공개적이고도 공적으로 제기했다는 점을 조심스럽게 주목해야겠다. 그들은 "중상 운동" 을 전개하면서 여호수아를 비방하며 자기들이 불이익을 당한다며 - 그들의 가족들과 가축들이 거주할 곳을 아직 배당 받지 못했으므로 - 원망하여 형제들 사이에 불화의 씨를 심으면 두루 다니지 않았다.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법정에서 질서정연하고도 정직하게 문제를 제기했다.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사 우리가 거주할 성읍들과 우리 가축을 위해 그 목초지들을 우리에게 주라 하셨나이다"(수 2:12).
그들의 청원은 간결하면서도 정곡을 찔렀고, 그 언어는 단호하면서도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걸인들처럼 나아와 자비를 구걸한 것이 아니다. 형평성에 호소한 것도 아니다. 자기들이 가치나 임무에 대한 충성을 빌미로 삼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모세를 통해 명하신 그분의 말씀을 청원의 근거로 삼았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을 근거로 처신한 것이다. 그러므로 레위인들은 이때에 불편함이나 투기의 동기로 처신한 것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많은 탐욕을 가졌다면, 그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그들 자신의 손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하거나 아니면 훨씬 일찍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그것을 이제 받도록 해달라는 청원을 질서를 좇아 제기한 것이다. 그들의 온유함과 인내가 극히 돋보였다. 기독교 시대에 그렇게도 많은 교회의 인사들의 성품과 처신은 이것과 얼마나 다른지 모른다.
돈에 대한 사랑과 권세에 대한 탐욕이 끝을 모르고, 지극히 악의적인 수단과 무자비한 방법들을 사용하여 교회원들을 수탈하여 자기들은 사치 속에 살고 "궁궐" 에 거주하는 자들이 허다하니 말이다!
모든 설교자가 본질상 같은 사고를 갖고 있고, 따라서 그것에 탐닉하지 않도록 극히 경계해야 마땅하다. 자주 인용되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하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 라는 말씀이 목회서신에 등장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엄숙한지 모른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서, 이렇게 말씀한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즉 그리스도의 종]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딤전 6:10-11).
그리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는 교훈이 동일한 서신에, 또한 위의 경고와 교훈 바로 앞에, 나타나는 것이 전혀 이유 없는 것이 아니다(딤전 6:8). 불만이 얼마나 죄악된 것인지 깨닫는 이가 별로 없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 의지요 하나님의 섭리를 거역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몫에 대한 불만족과 은밀한 불평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반대로, 만족하는 것이야말로 거룩한 마음의 자세요, 주 안에서 누리는 안식의 자세요, 그가 은혜로 주신 것들을 감사함으로 누리는 자세이다. 그러므로 만족하는 것이야말로 탐심을 막는 영적인 방책이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히 13:5).
과거의 악행을 피하는 길은 그와 정반대되는 덕을 힘써 배양하는 것밖에 없다. 설교자가 자신의 직분에 신실하고 주를 영화롭게 하고자 하면, 자신의 육신적인 욕망과 야망들을 죽이고, 모든 사치를 금하고 검소한 삶을 통해 그 자신이 이 땅에 것이 아니라 위에 것들을 사모하며 그것에 애착을 갖는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이교도 철학자인 소크라테스(Socrates)는 값비싸고 세련된 물품을 늘어 놓고 판매하는 것을 보고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내게 필요 없는 것들이 여기에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구나!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이 "허영의 시장"(Vanity Fair: 잉글랜드의 청교도인 존 번연[John Bunyan] 의 '천로역정' 중에 나오는 도시로 이 세상을 지칭함. 역주)을 사는 동안 가져야 할 자세와 언어요, 그분의 종들의 경우는 두말할 것도 없다.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고후 6:3-4).
이 얼마나 고귀한 경건의 기준인지 모른다! 하지만 모름지기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대변하는 자들에게서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그런 수준이다. 믿지 않는 이들은 언제나, 너무도 많은 명목상의 신자들을 욕되게 하고 정욕을 조장하는 경향이 복음 그 자체에 강하게 드러난다고 하며 비판하고 있고, 실제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삶에서 그런 면이 보일 때에는 특히 더욱 그렇게 비판한다.
이런 현상이 놀랄 만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일들을 체험적으로 접해 보지 않는 사람들의 편에서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로 얻은 구원을 선포하는 자들이 마땅히 그 구원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야 하리라고 결론짓는 것밖에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판단으로는 설교자의 일상생활이나 그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를 귀하게 만들거나 그것을 깎아내리거나 둘 중에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갖가지 다른 이유들도 있지만, 그리스도의 사역자에게 다음과 같이 명하고 있다.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7-8).
Arthur W. Pink 여호수아 강해 p7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