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eanings in Joshua 350] 도피성(수 18장)
지금 우리가 대하고 있는이 내용에서 분명히 드러나가니와, 이 도피성이라는 모형에는 죄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면이 있다. 살인자의 절박한 필요에 맞도록 자비로 혜택이 주어졌다. 그러나 그 혜택을 누리려면 그 자신의 스스로 힘써야 했다.
도피성이 그를 위해 은혜로의 베풀어져 있으나, 자신이 안전하기를 바라면 그 스스로 그리로 도피해야 하고 그리고 들어가야 한다. 만일 어떤 핑계로든 그리로 가지 않았다가 피의 보수자에게 살해당한다면, 그의 피는 그 자신의 머리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다른 한 분의 다음과 같은 말씀처럼 말이다.
"팔장 끼고 앉아 냉담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리만큼 그렇게 눈이 멀었거나 얼빠진 사람은 없으리라 본다. '내가 피할 운명이면 피할 것이니, 내 노력은 필요가 없다. 피할 운명이 아니라면 어차피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니, 내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다.'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이런 어리석은 언사를 내뱉거나 이런 식의 눈먼 어리석음에 빠져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보수자가 자신에게 손을 뻗을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결코 그런 식의 탁상공론에 빠져 있을 여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한 가지 목숨을 위해 도피하는 것 뿐이다. 임박한 심판으로부터 피하는 것이요, 도피성 문 안에서 안전하게 거하는 방법 방도를 찾는 것뿐이다.
도피성은 복음에서 죄인들에게 제시되는 바 그리스도의 명확한 모양이었다.
첫째, 도피성은 하나님의 친히 지정하셨다.
복음이 인간의 창작이 아니듯, 도피성도 사람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자비의 표현이었다. 그것들을 통해 은혜의 풍성함이 얼마나 놀랍게 드러났는지! 하나가 아니라 무려 여섯 개의 성이 마련되었으니 말이다.
도피성은 절박한 상황을 대비하여 마련되었다. 주께서는 이스라엘 사람이 부주의로 동료를 죽이는 일이 발생하기까지 기다리셨다가, 그때야 부랴부랴 그 사람을 정의의 칼에서서 구원시키도록 조치를 취하신 것이 아니다. 언제나 그는 필요를 채우는 일을 미리 사전에 마련하시는 것이다.
도피성들이 실제로 필요해지기 전에 이미 그것들을 마련해 두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죄인들의 구주로 지정하신 것은 갑작스런 비상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사후에 하신 조치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 속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계 13:8) 어린 양이셨던 것이다.
둘째, 도피성은 보수자가 피한ㄹ 피난처가 되었다.
이 점은 이 아름다운 복음적인 모형에서 아주 두드러지는 특질이었다. 살인자가 그에게 심판을 시행하기로 결심한 자에게서 추격을 받아 이 평안한 항구로 도피한 것이다. 태연히 그 일에 대처한다는 것은 헛된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정의가 뒤를 추격하는 처지에서 죄인이 그것을 아무 일 없이 물리칠 수 있다고 상상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
죽음 이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행 4:12)이다. 도피를 미룬다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그 성읍 중 하나로 도피하여 생명을 보존할 것이니라"(신 19:5).
이것이 불상사를 유일한 예비 조치였다. 불과 유황이 쏟아지는 소돔에서 머뭇거리는 일은 롯에게 위험천만한 일이었다(창 19:17).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 명하신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 3:7,8)
셋째, 도피성은 산이나 언덕 등, 뚜렷이 보이는 곳에 위치했다.
도피성들의 이름과 위치들이 이 점을 명확히 암시해 준다. 그리로 도피하는 자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도피성의 이러한 특질 역시 그리스도를 놀랍게 예시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행 5:31).
복음이 신실하게 선포될 때에도 도피성의 원형이신 그리스도께서 밝히 드러나며, 듣는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갈 3:1)도록 그렇게 그분을 선포한다.
같은 이유로, 그리스도를 회중 앞에 높이 세우는 그의 사역자들을 가리켜 "산 위에 있는 동네"(마 5:14)에 비한다.
Arthur W. Pink 여호수아 강해 p7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