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eanings in Joshua 334] 기업의 완전한 소유와 나태함(수 17-19)
2. 나태함
이는 전혀 호소력이 없는 제목이다!
과연 그렇다. 하지만 성경은 결코, 인간의 본성에 아첨하지 않으니, 하나님의 종 역시 그래야 한다. 아무리 불쾌하더라도 진상을 똑바로 대면해야 하고, 그것을 모면하려 하거나 부인해서는 안 된다. 이런 주제가 전혀 매력이 없기는 하지만, 분명시적절하다 여긴다.
사방에서 나태함이 우리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지 않는가?
모든 계층마다 게으름과 무정함의 자세가 드러나지 않는가?
오늘날 우리 세대만큼이나 일을 싫어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세대가 있었던가?
"조직된 노동" 이라는 표현이 "임무 회피"와 그의 동의어가 되었다. 최소한의 정력을 소비하여 최대한의 돈을 거두기 위해 국가에 보상을 요구한다. 반면에, 지난 한 세기 동안 지배했던 사회적 경제적 상황을 정상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너무도 많은 고용주들의 무자비한 탐욕으로 인해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익 보장을 위해 스스로 수직을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적인 부패로 인해, 지금에 와서는 그 반대의 극단으로 치우쳐서, 많은 고용주들이 그들이 지급하는 일당에 상당하는 만큼의 노동력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실정이다.
태초에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씀하신 대로, 사람이 죄 가운데로 타락한 결과 중의 하나는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창 3:19) 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노동을 단축하는" 기법들로써 그러한 하나님의 선고를 피하려고 노력해 왔고, 이는 전반적으로 나태함을 조장하고 건강을 제외시키며 때로는 생명을 잃게까지 만드는 대로 이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이 다 타락 때문에 생긴 것이라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지 않다. 무죄한 상태에서도 사람은 에덴동산에 있으면서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는 일"(창 2:15)을 담당했다. 그때는 일이 즐거움이요 안락함이었으나, 지금은 그것이 혐오스런 부담이 되었다.
오늘날처럼 도가 심했던 적이 없다. 보다 짧게 일하고 보다 많은 임금을 요구하는 - 임금의 상당 부분이 건전한 여가가 아니라 해로운 유흥에 사용되는 - 시대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이런 노동과 산업상의 폐해의 원인이 영적이며 종교적인 악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여러분 지적했다. 하지만 사회의 상황은 교회의 상황의 여파로 일어나는 것이다. 세상의 상태는 주로 교회들의 상태를 반영한다. 가정에서 부모의 권위가 무너지기 전에 먼저 교회의 회중 가운데 징계가 사라졌고, 국가의 법을 무시하는 것에 앞서 강단에서 하나님의 법을 내던져 버렸고, 따라서 기능공들의 무정한 모습은 그리스도인이라 자부하는 대다수의 나태함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주의 백성들 가운데서 완전한 모습은 절대로 볼 수가 없다. 하지만 상대적인 건전함과 강건함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세기 동안 영적인 부패의 모습과 실천적인 경건의 안타까운 쇠퇴의 현상이 뚜렷이 드러났다. 권능이 사라져가고, 사랑이 식었고, 성령의 열매와 의의 행위들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닌 대다수의 사람들이 "항상 주의 일에도 힘쓰는"(고전 15:58) - 전적으로 주께 순종하는 - 것이 아니라, "시온에서 편안히 있다"(암 6:1. 개역개정은 "시온에서 교만한"으로 번역함. 역주).
슬기로운 처녀들이 기름을 준비하고 등불을 켜고서 신랑을 맞으러 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처녀들과 똑같이 나태함에 빠져 잠들어 버렸다. 하나님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는 것(시 119:32)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약속들을 자기들의 마음에 "적용" 시켜 주시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도전적으로 전도에 나서는 대신, 대다수의 교회들은 자체의 교인들로 만족한다. 믿음을 위해 세상에서 순전히 싸우는 대신, 교회 안에서 서로 쓰라리게 으르렁거리고 싸운다. 주의 대의(大義)는시들어가고 사탄이 기뻐하는 형국이다.
Arthur W. Pink 여호수아 강해 p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