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시리즈/여호수아 강해 (Gleanings In Joshua)

[Gleanings in Joshua 332] 기업의 완전한 소유와 나태함(수 17-19)

En Hakkore 2024. 11. 28. 21:52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에 회막을 세웠으며 그 땅은 그들 앞에서 돌아와 정복되었더라"(수 18:1).

주석가들은 모두 이스라엘이 본진이 이렇게 이동한 것이 하나님의 정하심에 의한 일이었다는데에 동의한다. 그들은 여호수아가 장막을 길갈에서 실로로 옮기라는 모종의 메시지를 여호와께로부터 받았을 것으로 - 직접 말씀을 받았거나 혹은 대제사장의 우림과 둠밈을 통해서나 - 추정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새로운 위치의 이점들도 지적한다. 길갈은 요단 강가에 위치하여 팔레스타인의 변방에 속해 있었으나 실로는 그 땅을 중심부에 있었고, 그리하여 각 지파가 분리되어 강기 자기들의 지역으로 흩어진 후에 남자들이 방문하기가 훨씬 용이했다(신 16:16).

그러나 우리는 개인적으로 그것이 너무 지나친 상상이라고 본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온 이후 줄곧 길갈에 진을 치고 있었으나, 하나님이 그곳을 떠나라는 명령을 주셨다는 힌트가 조금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분의 뜻을 계시하셨다는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불길한 징조로 본다. 오히려 그들이 "사려 깊은 고려" - 그들 자신의 편의에 의한 결정-에 따라서 옮긴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더 개연성이 높은 것 같다.

"실로는 여호수아가 소속되어 있던 에브라임 지파의 기업에 속한 곳이었고, 따라서 성소가 통치자의 거주지 가까이에 있는 것이 편리했다"(스코트).

그러나 만일 그런 연유로 여호수아가 그렇게 조치한 것이라면, 그는 여호와께서 지시하신 길로 나아가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명철에 의지한 것일 것이다(잠 3:5, 6).

길갈은 할례를 시행한 곳(수 5:9) - 모형적으로 육체를 죽이며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것을 의미한다 - 이었고, 이스라엘이 매 전투를 끝내고 그리로 돌아올 때마다 여호와의 권능과 복이 그들에게 임했다
그러므로 길갈을 떠나는 일에 매우 신중을 기했어야 옳았다. 심지어 그 영적인 의미가 인간의 본성에게 매우 유쾌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들이 여호와의 인도하심을 구했다는 언급이 전혀 없고, 대제사장을 통해 주의 뜻을 알고자 했다는 암시도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18:1의 진술이 안타까운 갖가지 실패의 기록 바로 다음에 이어진다는 점을 조심스럽게 새겨야 한다.

그리고 성령께서 여기서 성막을 6:24처럼 "여호와의 집" 이라고, 혹은 22:19처럼 "여호와의 성막" 이라고 칭하시지 않으시고, 그저 "회막" 이라고만 부르신다는 점을 관찰하기 바란다 - "여호와의 유월절"(출 12:11)과 "여호와의 절기"(레 23:2)라 하지 않고, "유대인의 유월절" 과 "유대인의 명절"(요 2:13; 5:1)이라 칭하는 점을 참조하라.

극히 의미심장한 것은 사사기의 첫 부분(여호수아가 죽은 후 이스라엘의 실패들을 기록하는)에서,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삿2:10) 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진정한 본부에 계셨던 여호와의 임재의 사자를 이미 저버린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이 영적 빈곤과 무기력 상태에 있던 여러 세대에 걸쳐서 성막은 실로에 머물러 있었다(삼상 4:3). 그러나 수세기 후 하나님은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 이스라엘의 영적 부흥을 허락하셨고, 그 선지자들은 실로가 아니라 길갈을 그들의 본부로 삼았다(왕하 2:1).

이로써 성령께서는 영적 쇠락의 어두운 시기에 우리가 할례의(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장소를 우리의 본진 혹은 중심으로 삼으면 주의 복이 우리에게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길갈은 혈과 육에게는 전혀 반갑지 않은 헌신을 요구하며, 따라서 전혀 인기가 없다.

모형 그 자체도 그렇다. 길갈은 가나안의 한쪽 모퉁이 끝에 위치한 곳으로, 용사들이 진으로 복귀하기 위해 길고 힘든 여정을 거쳐야 하는 곳이었고, 따라서 좀 더 편리한- 육체적으로 손쉬운- 곳에 본부가 있는 것이 훨씬 더 용이했을 것이다.

주석가들은 "실로"가 메시아를 미리 선포한 이름 중의 하나(창 49:10)라는 사실을 중시하여, 이스라엘이 성막이 있을 곳으로 그 곳을 지명한 것이 바로 메시아를 염두에 두고 한 일이었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다. 왜냐하면, 18:1은 그들이 그곳의 이름을 "실로" 라고 붙인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에 이미 그곳이 실로로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실로" 라는 이름 자체는 "안식" 이라는 뜻이며, 이제 가나안 땅의 상당 부분이 정복된 터였으므로 그 이름이 그들에게 와 닿았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18:1의 기록이 이스라엘의 세 지파들이 저지른 몇 가지 두드러진 실패 뒤에 곧바로 이어진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이제 그 뒤에 곧바로 이어 여호수아가 다른 일곱 지파들에게 책망하는 것을 보게 된다.

Arthur W. Pink 여호수아 강해 p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