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eanings in Joshua 331] 기업의 완전한 소유와 나태함(수 17-19)
17:14-18에는 여호수아가 다시 한 번 자신의 성품의 놀라운 특질을 드러내 보이는 한 가지 사례를 기록하고 있다. 곧 요셉 자손들이 그에게 나와 다음과 같이 원망한다.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심으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함이니이까"(수 17:14).
요셉 지파는 물론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두 지파로 나뉘어 있었다. 그들 스스로 크다고 단언하는 것은 그저 숫자적으로만 크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출신이 존귀하다는 뜻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바로에 의해 애굽의 총리가 된 인물의 후손들이었으므로, 그 사실이 교만의 빌미를 제공했을 것이다. 이는 그 후의 이 지파의 역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런 점에 비추어 볼 때에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원망을 늘어 놓은 사실이야말로 그들의 교만한 자세를 특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그들이 이런 교만은 기드온을 향해 투덜거린 데에서도(삿 8:1), 입다의 처실에서도(삿 11:9, 30, 31), 또한 그 후 다윗의 시대에도 여전히 그들이 전혀 자질을 드러내지 못하면서도 이스라엘 중에서 우월한 지위를 주장하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내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하니라"(수 17:15).
여호수아는 그들의 주장을 그들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고, 그들의 교만과 불만, 그리고 그들의 불신앙과 나태함을 책망한다. 용기와 의욕이 있었다면 그들 자신이 영토를 확장할 여지가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컷은 이와 관련해 여기서 진술하는 바에 근거하면 당시 팔레스타인의 대부분은 수풀로 뒤덮여 있었고 그 지역의 가나안 거주민의 규모도 에스드랄론 골짜기와 남부 유다의 경계 지역에 사는 주민들보다 훨씬 적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중심부를 공략함으로써 가나안 족속들의 세력을 분리시킨 다음, 남부의 군대 전체로 먼저 공격하고 그 다음 북방의 원수들에게로 향하는 전략을 취한 것도 이와 잘 맞아 떨어진다고 진술한다.
이는 그들이 공격을 시작할 무렵 편안히 에발 산에서 율법을 반포한 사실과 후에 실로를 그들의 수도로 택한 사실을 잘 설명해 준다.
"요셉 자손이 이르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주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에게는 벧 스안과 그 마을들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다 철 병거가 있나이다 하니"(수 17:16).
여기서 우리는 그들의 탐욕을 보게 된다. 형제 에브라임 지파에게는 하나의 분깃이 별도로 돌아갔던 반면에, 17:5에서는 "요단 동쪽 길르앗과 바산 외에 므낫세에게 열 분깃이 돌아갔다" 고 보도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나안 땅 중에서 가장 큰 몫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만족하지 못했고, 더욱이 인근의 골짜기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들이 "철 병거"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언급함으로써 그들의 불신앙과 마음의 유약함을 드러내어, "큰 민족"인 체하는 그들이 태도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여러분, 여기서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싸워야 할 싸움을 중단하게 되면 악한 결과가 생기게 된다는 점을 다시 한번 보게 된다. 싸움을 중지하고 안일하게 되는 것만큼 그 자신의 몫에 대한 불만의 자세가 생기게 되고, 그리하여 원수들이 강력한 무기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앙이 가득하게 되는 법이다.
"여호수아가 다시 요셉의 족속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살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너희 그를 쫓아내리라 하였더라"(수 17:17-18).
우리는 이를 비꼬는 말이 아니라, 여호와를 신뢰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싸워 책무를 다하라고 독려하는 뜻으로 본다. 여호수아는 농토를 위해 개간할 넓은 살림이 거기에 있으니 나아가 싸우면 그 산지가 그들이 그것이 되리라고 말씀했다.
가나안 족속들의 막강한 군대가 중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마음을 가다듬고 여호와의 보호하심과 도우심에 의지하여 임무를 다하면, 그가 힘을 주사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주신 그 땅을 점유하고 있는 자들을 반드시 몰아내게 하시고, 그 모든 원수를 쓸어버릴 힘을 주시리라는 것이었다. 이런 여호수아의 대답에서 그들이 지금껏 부지런히 사명을 다하는 일에 매진하지 않았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에브라임과 므낫세 사람들은 틀림없이 여호수아에게서 자기들에게 좀 유리한 조치를 기대했을 것이다. 여호수아 자신이 에브라임 지파의 소속이었으니 말이다(민 13:8). 그러나 여호수아는 형제들에게 편파적으로 처신하기를 거부했고,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부여하신 직무에 대한 충성을 입증해 보였다.
이런 여호수아의 자세는 그의 원형이신 그리스도의 성품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그에게 가장 가까운 측근(야고보와 요한)이 그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으셨을 때에, 그들에 대한 편애의 자세를 전혀 보이지 않으셨다(마 20:20-23).
토마스 스코트는 이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논평한 바 있다.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자들이 만족하고 감사하고 기꺼이 누리기보다는 불평하고 투기하고 투덜거리기를 더 잘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소유를 운용하여 최고의 유익을 얻는 것보다는 다른 이들이 소유의 시선이 사로잡히기 일쑤다. 가난을 불평하고, 다른 이들에게 호의를 구걸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정의로운 선고를 거부하고 반항하기 때문이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창 3:19).
사람들은 어떤 핑계를 대고서라도 일을 하지 않으려 하고, 이때에 부유하고 막강한 인척보다 이용하기 좋은 대상이 없다. 그들의 쓸 것을 공급해 주기 위해 공공의 유익을 위해 맡겨진 자금들을 편파적으로 불성실하게 분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들이 나태함과 사치를 만족시켜 주는 것보다, 수고하면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유익거리들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 그들 스스로 분발하여 그것들을 얻게 하는 것이 진정 친절을 베푸는 것이다.
참된 신앙은 이런 악행에 대한 절대로 용인하지 않는다. 사도는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고 말씀한다(살후 3:10).♥
우리가 흔히 내뱉는 '할 수 없다'는 식의 말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불가능하다고 하고 위험한 일마다 반드시 무너진다고 치부하는 그저 게으름의 언어일 뿐이다. 특히 우리의 영적인 일과 영적 싸움의 경우에 이런 일이 흔히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가 나태하고 자기 멋대로 처신한다면 여호와의 군대장관과의 관계를 아무리 자랑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위로가 가로막혔다는 우리의 불평 그 자체가 십자가를 소홀히 하고 그것을 두려워하는 데서 연유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믿게 되면, 가만히 앉아 아무 일도 시도하지 않게 되기 십상이다."
이런 것이 고금을 통해서 나타나는 초라한 인간 본성의 모습이었다. 육체의 맹렬한 에너지의 부추김으로 인해, 보내심을 받지 않았는데도 무턱대고 달려가거나, 혹은 하나님이 행하라고 명하신 일을 힘을 다해 행하지 않고 게으름 피우며 투덜대는 것이다.
Arthur W. Pink 여호수아 강해 p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