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시리즈/여호수아 강해 (Gleanings In Joshua)

[Gleanings in Joshua 319] 가나안 땅의 분배(수 14:1-16:10)

En Hakkore 2024. 11. 23. 16:57

이 모든 본문들을 그 분명하고도 정당한 의미대로 받아들여야 하고, 우리 마음에 합당하게 새겨야 한다. 칼빈은 다음과 같은 간결한 진술에서 이 문제에 대해 극히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준다.

"성경은 우리의 행위가 온 동부정함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도저히 설 수가 없음을 진술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행위의 진 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은 율법을 완전히 지켰을 경우에는 - 혹시 그런 경우가 있다고 가정하면 - 어떠한지도 말씀해 주고 있다.

곧 우리에게 요구되는 바를 다 행한 후에도 우리 자신을 무익한 종으로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눅 17:10). 율법을 다 지켰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요구하신 것 이외에 다른 무엇을 더 행한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가 해야 마땅할 일을 했을 뿐이므로, 하나님 편에서는 그것에 대해서 별을 달리 감사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선행들을 우리 것이라 부르시며 그것들이 주님께 합당할뿐 아니라 그것들에 대해 상급이 주어질 것임을 증거하신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그토록 큰 약속의 힘입어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않도록 용기를 가지며, 또한 하나님의 크신 자비하심을 참된 감사의 마음으로 받을 의무가 있는 것이다...

선행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요 그것을 행하는 자들에게도 열매를 내는 것이다. 선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가장 귀한 은혜들을 상급으로 받는데, 이는 그들이 그럴 말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분의 자비하심으로 그러한 가치를 그들에게 부여하시기 때문인 것이다"(기독교 강요 3권 15장).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위해서(그분의 공로에 근거하여), 또한 그분의 백성들의 순종으로 인해(새 언약의 조건과 하나님의 통치 원리에 따라), 그 백성들에게 미래의 상급을 베푸실 것인데, 만일 이것이 그분의 완전하심과 견주어 "일관성이 없는 것"이라면, 그가 그들에게 현재의 상급을 베푸시는 것도 똑같이 일관성이 없다.

왜냐하면, 시간이나 장소가 달라진다고 해서 그 일이 근본적인 본질의 변화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이 세상에서 그들을 풍성하게 보상하신다는 사실은 여러 본문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시 119:165, 참조. 사 58:13-14).

신자가 현재의 누리는 평안과 기쁨은 본래 그리스도의 중보로부터 흘러내리는 것이지만, 신자 자신의 순종과 충성에 종속된다 - 만일 불순종의 길을 걷는다면 양심이 평안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자기를 부인하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큰 상이 있다. 그들은 현세에도 "백배나 받고" 그리고 "내세의 영생"을 받을 것이다(막 13:30).

"경건한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8).

은혜를 두드려지게 강조한 사도였던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푯대를 향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 가노라"(빌 3:14).

그 "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든 간에, 성령께서 그를 감동하사 그 용어를 사용하게 하셨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의 상은 - 현재의 상이든 미래의 상이든 - 고용된 품꾼이 임무를 이행한 대가로 지급받는 품삯으로 우리에게 지급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은혜로의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

이 점은 다음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의 선행을 산출해내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주께서 우리의 모든 일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이다"(사 26:12).

우리의 선행이 오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인정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의 선물이나 자비로운 베풂(빌 4:18)과 우리의 예배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벧전 2:5) 하나님이 받으실 만하게 된다.

그렇다.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도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의 "향연"이 그 기도에 더해지기 때문이다(계 8:3-4). 우리가 행하는 행위들이나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장차 우리가 누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고후 4:17)의 분량과 서로 정비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상이란 결코. 개인의 값어치를 인정하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 어떠한 선한 것도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상과 버림받은 자들에게 있게 될 형벌과의 근본적인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악인에게 부과되는 형벌은 철저한 정의의 행위요, 죄의 삯은 그들에게 갚아준다.

그러나 의인에게 베풀어지는 상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요 따라서 자랑할 여지가 전혀 배제된다. 피조물이 하나님을 빚진 자의 처지에 계시게 만든다는 것은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피조물이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는 모든 일에 대해 은혜로 인정하시고 갚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부지런한 수고에 대한 격려로(시 126:6), 충성에 대한 격려로(히 11:26), 선을 행하는 중에 낙심하지 않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방도로(갈 6:9), 상에 대한 약속들이 제시된다. 주 예수께서 십자가를 참으신 것이 "그 앞에 있는 기쁨"(히 12:2)을 위함이었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것은 하나님은 성도의 섬김에 대해 그분이 인정하심을 나타내시기 위해, 성령으로 하여금 동시에 그들 속에서 역사하시도록 하신다는 점을 - 그들의 섬김은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하심의 "열매들"이기 때문에 - 지적해야겠다.

Arthur W. Pink 여호수아 강해 p6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