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시리즈/여호수아 강해 (Gleanings In Joshua)

[Gleanings in Joshua 318] 가나안 땅의 분배(수 14:1-16:10)

En Hakkore 2024. 11. 23. 16:57

여섯째, 우리의 기업은 상(賞)이다. 여러 차례 지적한 바와 같이 가난한 약속의 땅이었으나, 이스라엘은 그 땅을 얻기 위해 싸워야 했다. 심지어 야곱도,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았으므로 자신도 그 땅의 한 몫이 자기 것이라고 말씀한 바 있다(창 48:22).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유산으로 주어졌으나, 그들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고서야 비로소 그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셨으므로 그 땅이 그들의 것이었지만, 실제로 그 땅에 들어가 소유하는 일은 그들 자신의 노력의 결과였던 것이다.

이런 서로 다른 원리들 사이의 "일관성"과 조화를 감지하든 하지 못하든, 그것들은 서로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 원리들은 우리에게 전혀 난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둘이 서로 모순이 아니라, 서로 보완해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이 모든 일의 기저에 있으나, 사람들은 - 그분의 백성도 예외가 아니다 - 다루시는 하나님의 역사에서는 언제나 그들을 도덕적인 행동자들로 대하시며, 그들에게 책임을 지우시고, 선한 씨든 악한 씨든 심은 대로 거두도록 하시는 것이다.

자!
지상의 가나안을 분배하고 어떤 일에 관한 문제는 하늘에 가나안과도 직접 연결된다. 그렇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님의 모형으로 하여금 그 원형을 정확히 그림자로 투영하도록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골로새서는 이렇게 말씀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에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3-24).

기업만큼 값없이 호의로 베풀어지는 것이 없다. 그런데 그것이 기업이라면, 그것을 "상" 이라고 부르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인가? 상이라면, 어떻게 그것이 동시에 "기업"이 될 수가 있을까?

이 둘은 서로 전혀 영립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인다. 특히 기업을 가리켜 "값 주고 산 소유"(the purchased possession)" 엡 1:14, 개역개정은 이를 "그 얻으신 것" 으로 번역함. 역주) -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것 - 라고 칭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어법은 전혀 모순이 아니다.

구주께서는 유대인들에게 교훈하시면서,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믿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신 후에 다시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라"고 덧붙이셨다(요 6:27). 그리고 히브리서에서도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라고 말씀한 후에, 다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로 힘쓸 지니"라고 권고하는 것을 본다(히 4:3, 11).

성경에는 불신자들의 눈에 서로 모순인 것처럼 보이는 내용이 많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지만"(신 6:4), 동시에 서로 구별되는 삼위가 계신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지만(시 136:1), 그는 수많은 피조물들을 영원한 형벌에 처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라고 말씀하시면서도, 다시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요 14:28)라고도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진술들의 완전한 조화를 깨닫지만, 동시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것들도 있다.

예를 들어서,
일어난 모든 일을 하나님이 예정하셨으니, 인간의 자유 행위와 책임의 시행의 여지가 어디에 있는가?
인간이 타락으로 인해 모든 영적 힘을 다 빼앗겼다면, 영적인 임무들을 행하지 못한다고 그분을 탓하는 것이 과연 공정한 일이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오직 택한 자들만을 위해 죽으셨다면, 어떻게 그가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베풀어질 수 있는가?
신자가 그리스도의 "자유인"이라면, 어째서 그분의 멍에를 지라고 요구하는가?
신자가 자유를 얻었다면(갈 5:1), 그가 어떻게 "율법 아래" 있을 수가 있는가?(고전 9:21).

하나님이 신자를 끝까지 보존하시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서 신자가 영적인 복락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끝까지 인내해야 한단 말인가?
죄가 신자를 주장하지 못한다면(롬 6:14), "죄악이 이기는 일이 어떻게 그렇게 자주 일어나는가?(시 65:3).

어떠한 난지가 개입되어 있다 할지라도,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상 주시고 이기는 자에게 면류관을 베푸신다는 말씀이 성경에 적지 않게 나타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시 19 11).

"공의를 부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잠 11 18).

"그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7).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3).

"그들(가난한 자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눅 14:14).

그리고 하나님이 그분 종들의 충성을 특별히 주목하시고 그들이 그분을 위해 당하는 고난에 대해 합당하게 보상하실 것이라는 선언들도 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의 상이 큼이라"(마 5:11-12).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내게 주리라"(계 2:10).

Arthur W. Pink 여호수아 강해 p6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