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fe of David175] 거부된 친절(사무엘하 10장)
다윗의 동기
여기에서 나는 사무엘하 10장에 기록된 사건이 제시하는 구원의 은총에 대한 사랑스러운 예표적 측면을 서술하는 대신 다윗의 개인적 동기를 살피고 그것이 거듭해서 알려 주는 교훈과 경고에 주목할 것이다.
"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이 죽고 그의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다윗이 이르되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의 아버지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 같이 하리라 하고 다윗이 그의 신하들을 보내 그의 아버지를 조상하라 하니라"(삼하 10:1-2).
우리가 이 구절들에 내포된 실제적 가르침을 얻기 위해 고찰할 필요가 있는 첫 번째 질문은, "어째서 다윗이 신하들을 보내 암몬 왕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는가"이다. 그를 움직였던 동기는 무엇이었나? 그 질문에 대해 "그의 친절한 마음"이라고 대답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그 질문을 "어째서 그가 그 이방 민족의 수장에게 친절을 베풀기로 결심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본문의 정황을 면밀하게 살피는 것을 통해서다.
역대상 19장의 정황은 사무엘하에서는 약간 멀리 있다. 왜냐하면 역대상 18장은 사무엘하 8장(지금 다루고 있는 10장 직전에 있는 9장이 아니라-역주)과 병행을 이루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무엇을 발견하는가?
다윗은 전쟁을 벌이고, 블레셋 사람들(삼하 8:1), 모압 사람들(2절), 하닷에셀(3절), 그리고 아람 사람들(5절)을 정복하고, 에돔에는 수비대를 두고, 왕국의 질서를 세웠다(15-16절). 그렇게 많은 싸움을 치룬 다윗은 이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것은 다음 장의 첫 구절이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삼하 11:1)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을 통해 입증된다.
그러므로, 이 사건의 직접적인 정황에 비추어 볼 때, 즉 사무엘하 10장과 역대상 19장의 전과 후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다윗이 하눈의 아비가 죽었을 때 그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보낸 것은 암몬과 이스라엘 사이에 평화를 확보하기 위한 그의 외교적 노력이었음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그것은 불경건한 자와 경건한 자 사이에 우호관계를 형성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이런 시도를 깨뜨리고 무위로 돌리셨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
우리는 그것을 이론적으로는 안다. 아,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자주 실제로는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세상과 구별되고, 세상에서 낯선 자와 순례자가 되고, 세상의 백성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고, 그들과 함께하는 모든 "멍에"를 거부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리고 그것은 옳을 뿐 아니라 필요하기도 하다.
사실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하는 자들과 그를 미워하는 자들 사이에,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는 자들과 사탄과 연합한 자들 사이에 어떤 교제가 있을 수 있는가?
그러나 이런 원리가 분명함에도 우리 중 많은 이들은 우리의 삶의 방식을 그 원리요 요구들에 맞추는 데 얼마나 느린가!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적들과 시시덕거리는가!
하나님의 훼방
그러나 우리는 부주의하고 불순종할지라도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그분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종종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우호적인 접근을 거부하고, 우리의 친절한 제안을 곡해하고, 우리를 조롱하고 모욕하게 하신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 사이에 그어놓으신 선의 우리 쪽 편에 머물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이 사악한 자들을 사용해 우리를 그들의 영토 밖으로 내쫓으실지라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사랑하는이여, 바로 여기에 종종 그리스도인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경험들에 대한 열쇠가 있다. 어째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가 좋게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서 그토록 부당하고 잔인한 대접을 받게 하시는가?
하나님이 사탄의 후손들과 여자의 후손들 사이에 정해 놓으신 적대감이 여자의 후손들을 향해 폭발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은 그들이 사탄의 후손들과 지나치게 친밀해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꾸짖으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이 세상과 교회사이에 그어놓으신 선을 무시했기 때문일 뿐 아니라, 또한 그분이 촉진하기 원하시는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렇다. 그리스도인이여, 그리고 이 "모든 것"에는 전에 당신에게 친절했던 불신자들이 지금 당신을 서름서름하게 대하는 것이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친지들의 차가운 반응, 이웃들의 불친절, 사무실과 가게와 직장에서 당신 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당신에게 보이는 비우호적인 태도들이 포함된다.
설령 당신은 그것을 보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에게 닥친 위험을 보신다. 그분은 당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당신이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것을 크게 방해할 수도 있는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것을 막으신다. 그러므로 당신의 동료들의 태도에 대해 안달하는 대신 주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감사하라.
이상에서 언급한 내용에 대한 반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분리된다는 것은 사회와 격리되어 은둔자차럼 살아가거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사교적이 되거나 동료 인간들에게 까다롭게 굴 것을 요구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겠다.
아니다. 사랑하는이여,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할 것"(벧전 3:8)을, 특히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갈 6:10) 그렇게 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은 동료 인간들을 향해 "나는 너보다 거룩하다"는 식의 태도를 갖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럼에도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을 향한 정중하고 친절한 행위와 그들과의 부적절한 교제 - 그들을 절친한 친구로 삼는 것 -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또 다른 반대도 있을 수 있다. 사실 이 경우에 다윗이 취한 행동은 적절할 뿐 아니라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본문 2절은 분명하게 하눈의 아버지가 그에게 은총을 베풀었다고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다윗이 얼마간이라도 그에게 적절하게 보답하지 않는다면, 그는 비난받아 마땅한 배은망덕을 하는 셈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암몬 왕 나하스가 다윗에게 베푼 친절의 본질은 정확하게 무엇이었는가? 성경은 그것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따라서 추론은 쓸모가 없다. 그러나 만약 다윗이 전에 가드 왕 아기스에게 했던 것처럼(삼상 27:1-7) 그에게서 얼마간 호의를 얻기를 바랐다면,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자기가 의지해야 할 대상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부르심과 특권적 지위를 모두 포기하는 어리석은 죄를 지은 셈이었다.
상황이 그럴 경우, 즉 우리가 사람을 믿고 피조물에게 의지할 경우,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인간적인 소망을 책망하고 좌절시키실지라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Arthur W. Pink 다윗의 생애2 p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