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시리즈/다윗의 생애 (Life of David)

[The Life of David174] 거부된 친절(사무엘하 10장)

En Hakkore 2024. 2. 27. 15:03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들은 심히 넓으니이다"(시 119:96). 갈라디아어역 성경(The Chaldee Paraphrase)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나는 내가 관심을 가졌던 모든 일들의 끝을 보았다. 그러나 주님의 계명들은 매우 크다."

시리아역 성경(The Syriac Version)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읽는다.

"나는 모든 종교와 나라들의 끝을 보았다. 그러나 주님의 계명들의 범위는 광대하다" 시편 기자는 "피조물의 일들"과 "창조주의 말씀"을 구별한다. 세상의 일들 중 가장 완벽한 것조차 불완전하다. 최상의 상태에 있는 인간조차 "모두가 허사뿐이다"(시 39:5).

우리는 인간의 일들의 끝과 한계를 즉각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혜의 가장 심원한 산물조차 알고 피상적이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의 경우는 상황이 아주 다르다.

"주의 계명들은 심히 넓으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완전함에 참여한다. 그분의 놀라운 특성들 중에는 거룩함, 모오함, 무한함, 그리고 영원함 등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깊어서 아무도 그것을 지어낼 수 없고(시 36:6), 너무나 높아서 하늘에 굳게 서 있고(시 119:89), 너무나 길어서 영원의 세월을 견디고(벧전 1:23), 너무나 넓어서 아무도 측량할 수 없고, 너무나 충만하기에 그 내용이 결코 고갈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나 풍성한 영적 보화의 저장소이기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의지할지라도 그 부요함이 줄어들지 않는다. 그것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광대한 지혜를 포함하고 있기에 그 안에 있는 어느 한 구절도 사람이 지어낸 것일 수 없다.

그 중 어느 한 장에 대해 전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글을 썼을지라도, 여전히 성령께서는 전에는 그 안에서 결코 인식되지 않았던 놀라움과 아름다움들을 계시하실 수 있다.

동일한 사건에 대한 다른 관점

이제 나는 앞 장에서 살폈던 사건을 다시 살필 생각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과는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그렇게 할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약간의 설명적 진술을 할 것이다.

성경에는 우리가 몇 가지 측면에서 적절하게 적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서로 다른 각도에서 고찰할 필요가 있는 말씀들이 많이 들어 있다. 종종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를 드러내는 사건들이 또한 인간의 타락과 죄를 드러내기도 한다.

삼손의 삶의 많은 부분은 아주 뚜렷하게 그리스도를 예표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그 안에서 삼손 개인의 안타까운 실패들을 목격하기도 한다. 구약 성경의 다른 위대한 인물들의 삶에서도 그와 동일한 이중적 모습이 예시된다.

우리는 그로 인해 혼란에 빠지는 대신 오히려 그토록 다양한 것들을 한데 모으시는 분의 지혜에 감탄할 필요가 있다.

모세는 안타깝게도 잘못을 저질렀다. 그는 바로에게 말씀하시기 위해 그를 부르셨던 분께 믿음을 갖고서 즉각 반응하는 대신, 불신앙에 굴복해 거듭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출 3장). 그럼에도 한편으로 우리는 그 모세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두려워 떠는 모습에 대한, 그리고 자기에게는 그런 일을 할 만한 자격이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은 완전히 무가치한 존재라고 여기는 겸손에 대한 사랑스러운 예시를 발견할 수 있다.

그 두 측면은, 비록 그것들이 모세의 개인적 실패라는 동일한 사건에서 나타날지라도 서로 아주 다르다. 그러나 그의 실패는 하나님의 참된 종 안에 있는 겸손에 대한 복된 예표를 제공한다.

사무엘하 10장에 기록된 이야기 역시 한 가지 사건이 갖고 있는 병립하는 두 측면을 보여 준다.

다윗이 암몬 왕에게 조의를 표하고자 했던 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그분의 종들을 파송하시는 것에 대한 아름다운 예표를 제공한다. 그러나, 곧 살펴보겠지만, 사사로운 관점에서 본다면, 다윗의 그런 행위는 비난 받아 마땅했다.

동일한 모습이 요나의 관련해서도 나타난다.

우리는 주님 자신이 하신 말씀을 따라 그를 그분에 대한 "표적"으로 간주할 수 있고(마 12:30-40), 또 그 선지자가 실제로 여러 가지 다른 모습으로 구주를 예시하는 것에 놀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도 그것은 우리가 그의 이야기를 읽을 때 발견하게 되는 그의 몇 가지 안타까운 죄들을 가려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이여, 설령 지금 내가 사무엘하 10장 내용에 대해 앞장에서 했던 것과 아주 다른 설명을 할지라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앞 장의 설명과 이 장의 그것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상이한 설명들은 동일한 사건을 두 가지 아주 다른 각도에서 접근함으로써 나온 결과일뿐이다.

이런 주장은 그 사건이 역대상 19장에서 동일한 모습으로 묘사되지만, 그 사건의 정황이 사무엘하 9장과는 아주 다르다는 사실을 통해 정당화될 수 있다.

Arthur W. Pink 다윗의 생애2 p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