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eanings in Joshua 265] 기브온에서의 승리(수 10:1-43)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 3:14).
그런데, 이런 질문이 자주 제기된다." 주께서 나를 위해 해 주신 그 모든 것에 대해 어떻게 해야 내가 갚아 드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그분이 놀라운 자비하심에 대한 나의 감사한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성경의 해답은 바로,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잠 4:23)는 것이다. 참된 경건은 머릿속에서나 손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분을 향한 섬김의 영역이 바로 마음에 있다. 남은 여생 우리가 부지런히 가꾸어가야 할 것은 무엇보다 마음이다.👌
메마른 광야, 아니 버려둔 밭(잠 24:30, 31)을 변화시켜 주께서 기뻐받으실 만한 정원으로 일구며, 가라지를 뽑아내고 가시와 엉겅퀴들을 불태우고 향기로운 꽃들과 풍성한 과일들을 심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열매 맺기를 원하노라"(아 4:16) 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만과 육체의 끈질긴 에너지로 인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가기보다는 형제들의 영혼에 대해 온통 관심을 쏟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른 이들에게 설교하는 것은 쉬우나, 자기 자신의 죄악성을 정복하는 것은 훨씬 어려운 법이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아 1:6)라고 고백하게 될까 심히 두렵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 3:5).
신자가 담당해야 할 임무와, 그에게 부과된 큰 과제가 여기에 있다. 본문의 동사의 시제는 지속적인 행동을 나타낸다. 곧 그저 한 번 행하고 거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 날마다 관심을 쏟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악한 정욕을 가리켜 여기서 "지체"라 칭하는데, 이는 신자들 속에 내주하는 죄를 사람의 장기(臟器)- "옛 사람"(엡 4:22)," 이 사망의 몸"(롬 7:24)- 비한다. 우리의 본성적인 몸 외에, 영혼을 완전히 아우르는 부패의 몸이 있으니. "육의 몸"(골 2:11)이 바로 그것이다.
"땅에 있는 지체" 라고 덧붙인 것은 본문을 우리의 육체의 몸을 죽인다는 뜻으로 잘못 오해해야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육체를 절단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본성적인 몸이 지체들을 사용하듯이 우리의 부패한 본성이 정욕들을 이용한다.
죄가 그리스도인들 속에 과연 살아 있다. 육체 혹은 악한 본성은 언제나 성령을 대적하며(갈 5:17), 그것을 제어하는 일에 대강 임에서는 결코 안 된다. 부패한 성향들을 남김없이 완전히 처리해야 하며, 죄악된 정욕들을 단호히 배격하고 악한 생각들을 처절하게 거부해야 한다.
위험한 대적들은 부드럽게 다루고서는 안 되며, 마찬가지로 죄에 대해서도 자비를 보여서도 안 되고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여 그것을 확실히 죽이기를 힘써야 한다. 죽이라는 것은 완전히 없애라는 뜻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영적이며 천상적인 생명을 대적하는 이 땅에 속은 것들과 육신 적인 것들에게로 향하는 모든 정욕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절대적인 의미로(곧, 죄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제거하도록 그렇게 죽인다는 의미로) 이해할 것이 아니다. 다만 소용이 없게 만든다는 뜻이다.
로마서 4:19은 아브라함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음"을 알았다고 말씀하는데, 이는 절대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의 본성적인 체력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1:12는 그가 "죽은 자와 같았다" 고 말씀한다.
오웬(잉글랜드의 청교도 신학자. 역주)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죽인다는 것은 어떤 사물이 특정한 목적과 관련해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능력과 힘을 없애는 지속적인 행위를 뜻한다"
우리가 육체의 애착거리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육체를 억제 억누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죽이는 일" 이라는 비유적인 표현은 그 일이 고통스럽고 온갖 괴로움이 수반되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이 괴롭다고 해서 그 일을 소홀히 하면, 우리 자신이 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될 뿐이다. 그 일을 소홀히 하면 우리 속에 내재하는 은혜가 약화되고 낭비된다. 죄와 은혜가 동시에 영혼 속에서 강하게 역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 말이다.
Arthur W. Pink 여호수아 강해 p5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