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시리즈/다윗의 생애 (Life of David)

[The Life of David171] 신하들이 모욕당함(사무엘하 10장)

En Hakkore 2024. 2. 27. 15:01

다윗의 생애와 관련해 기록된 다음의 사건은 한 가지 이상의 관점에서 고찰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이 사건이 사무엘상 10장에서는 그가 므비보셋에게 친절을 베푼 직후에 기록된 반면, 역대상 19장에서는 사무엘하 8장과 동일한 내용(다윗이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는 이야기들- 역주)에 대한 언급 직후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통해 암시된다.

비록 사무엘하 10장과 역대상 19장의 정황은 다르지만, 그 이야기들은 모두 "그 후에"(삼하 10:1; 대상 19:1)라는 동일한 말로 시작된다. 이 사건이 사무엘하와 역대상에서 거의 동일한 언어로 길게 묘사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이중의 의미를 갖고 있음을 보여 주며, 또한 이 사건이 서로 다른 정황 속에서 서술된다는 것은 그것이 그 각각의 정황과의 관계에서 별도로 고찰될 필요가 있음을 보여 준다.

여기에서는 먼저 이 주제를 앞 장에서 살펴보았던 내용 직후에 나오는 사건이라는 맥락에서 살피도록 하겠다.

이방을 향한 복음 전파

암몬의 왕이 죽자 다윗은 이웃으로서 그리고 친구로서 그 왕의 아들에게 조의를 표하고자 했다. 다윗은 자기의 신하들을 보내 그를 위로하려고 했다. 그러나 암몬 사람들은 이 친절한 행위를 고맙게 받아들이기는커녕 불신과 의심으로 대응했다.

암몬의 관리들은 다윗이 자기들의 도시에 대해 악한 계획을 품고 있으며, 표면상 자기들의 죽은 군주를 조문하러 온 자들은 실제로는 자기들을 전복시킬 목적으로 정보를 얻기 위해 접근한 첩자들에 불과하다고 상상했다. 그로 인해 하눈 왕은 자기를 찾아온 자들을 조악하게 모욕하고 공개적으로 수치를 주었다. 그의 행동은 다윗에 대한 선전포고였고, 이스라엘의 왕은 그것을 그렇게 해석했다.

이 장의 나머지 부분은 그들의 모욕 때문에 촉발된 전쟁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내가 관심을 갖고자 하는 것은 그 사건의 예표적이고 영적인 의미다. 그런 의미를 확인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무엘하 9장과 10장 사이의 연결고리는 아주 분명하다. 9장은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라는 말로 시작되고, 10장은 "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이 죽고 그의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다윗이 이르되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의 아버지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 같이 하리라"라는 말로 시작된다.

그러나 이 두 구절에서는 내가 볼드체로 표시한 말들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것들이 날카롭고 엄중하게 대비된다. 다윗은 9장에서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10장에서는 암몬 사람에게 친절을 베푼다.

9장에서 그 친절은 그의 대적의 후손에게 주어지고, 10장에서는 자기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사람의 아들에게 주어진다. 9장에서 그의 은혜로운 제안은 깊은 감사를 얻고 10장에서 그것은 악의에 찬 조롱을 당한다.

우리는 앞의 두 장에서 사무엘하 9장의 내용을 상세히 고찰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이 택하신 사람에게 베푸시는 값없는 주권적 은혜에 대한 사랑스러운 예표적 측면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사무엘하 10장에서 분명하게 예시되는 내용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나는 사무엘하 10장의 처음 다섯 구절에 사용된 단어들을 면밀하게 살펴보고 그것들에 대한 추가적인 대조 작업을 실시할 것이다. 사무엘하 9장 전체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다윗 자신이다. 반면에 사무엘하 10장에서 무대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다윗의 신하들이다.

2-4절에서 "다윗의 신하들"이라는 말은 네 번이나 언급된다. 반면에 앞 장에서 그의 신하들은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바로 거기에 이 사건의 핵심이 들어 있다. 예표적으로 여기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다윗의 후손이신 분의 종들이다.🌱

복음을 맡은 자들의 자세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딛 3:4). 그러면 이런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은 무엇을 통해 나타나는가? 복음을 통해서다. 그리고 그분의 복음은 누구에게 선포되는가? "만민에게"(막 16:15)다. 여러분 그리고 설교가들-중에는 이런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는 이들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종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그분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널리 알리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그분이 그런 복음 선포의 대상으로 삼으신 자들 중에는 성령의 일깨움을 받았다는 증거를 지닌 자들뿐 아니라, 중생하지 못한 자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만약 그 어떤 신조나 신학체계가 복음의 값없는 선포와 관련해 설교자를 속박하고 족쇄를 채운다면, 거기에는 무언가 심각한 잘못이 있는 것이다. 복음이 택함을 입은 자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심각한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우리가 "전도자의 일을 하기 위해"(딤후 4:3) 반드시 보편 구원이나 타락한 인간의 자유 의지를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자신이 "옥토"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밭에 씨를 뿌리셨음을 분명히 보여 주신다. 마태복음 13장에 실려 있는 마지막 비유에서 그분은 "좋은 것"은 물론이고 "못된 것"까지 포함해 온갖 종류의 물고기를 잡은 복음이라는 그물을 대표하신다.

큰 잔치의 비유에서 종은 밖으로 나가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라고 전해야 했는데, "다 일치하게 사양하는" 사람들에게까지 그렇게 해야 했다(눅 14:17, 18).

예수님은 두 아들의 비유의 마지막 장면에서 맏아들(자기의에 빠져 마음이 완악한 바리새인들)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선포하셨다. "아버지가 나와서 권했다"(눅 15:28),

오, 사역에 임하는 형제들이여, 당신의 사역의 범위를 그리스도의 그것과 일치시키기 위해 은혜와 지혜를 구하라!

그리스도의 뒤를 이었던 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베드로는 무차별적으로(행 3:9)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17절)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19절) 하고 말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행 8:5).

우리는 빌립이 복음을 전한 대상이 성령에 의해 깨우침을 받은 소수의 무리가 아니라 사마리아 주민 전체였다는 말씀을 듣는다. 그리고 그의 설교의 주제는 무엇이었는가? 죄인들 중의 괴수에게라도 충분한 구주이신 그리스도였다! 사도 바울의 메시지는 어디에도 묶여 있지 않았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다"(행 20:21). 그는 뉘우치지 않는 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했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구주에 대한 믿음을 명령했다. 이것들은 우리가 따라야 할 선례가 되도록 기록된 것 아닌가!

내가 앞의 새 문단에서 강조한 내용은 우리가 이제부터 살피려 하는 사건을 통해 놀라운 예시와 확증을 얻는다. 만약 사무엘하 9장이 하나님이 그분의 택하신 백성들 중 한 사람에게 베푸시는 은총에 대한 복된 실례를 제공한다면, 지금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본문은 주님께서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까지 확대해서 제공하시는 은혜를 분명하게 예표한다.

그 두 가지 사건들이 나란히 놓여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후자가 전자를 보완한다. 만약 앞 장에서 우리가 다윗이 자기와 언약 관계에 있는 자를 향해 베푸는 "은총"을 보았다면, 이 장에서 우리는 그가 이스라엘 밖에 있는 이방인에게 베푸는 "은총"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거기에 우리의 본문의 아름다운 예표적 의미가 들어 있다. 또 이것은 우리가 이 본문을 통해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위대한 복음적 교훈이다.🤞

Arthur W. Pink 다윗의 생애2 p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