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266]
거짓 선지자들 3(마 7:15)
우리는 앞 장에서 마태복음 7:15에 대하여 설명하였었고, 그 장의 끝부분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특히 선한 행실과 구원의 관계에 대하여 영혼들을 치명적으로 미혹하고 있다고 주장하였음을 상기해 보자.
즉 그들 중 한 부류는 구원은 행함에 의한다고 가르쳤으며, 다른 한 부류는 구원은 행함이 없이도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었다. 이와 같이 제기된 문제는 아주 중요한 것이어서 이에 대한 몇 가지 단호한 진술만으로 대강 처리하고 마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더욱이 오늘날에는 종교계에 극심한 언어의 혼동이 있고 정통파 성직자가 취하는 방법조차 지극히 피상적이어서(그들은 무엇에 대하여 가르친다기보다는 단지 '설교'만 하는 자들인데) 주님의 백성조차도 이에 대한 가르침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이러한 가르침은 가르치는 자 편의 근면과 수고로운 연구를 필요로 하며, 그 가르침을 받으려는 자 편의 주의 집중과 인내를 요구한다. 우리는 진리를 '사야만' 한다(잠 23:23).♡
앞 장에서 우리는 구원과 선한 행실의 관계를 규정하고 설명하려고 하였었다.
첫째로, 우리는 선한 행실이 아무 공로적 가치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였었다.
이 말은 선한 행실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얻어낼 수 없으며 우리의 구속에는 아무 도움도 공헌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로, 우리는 선한 행실이 필요하다는 것, 즉 선한 행실이 없이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였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 편의 선한 행실이 조금도 필요하지 않으며, 또한 선한 행실 로 우리의 과거의 실패나 죄를 보상할 수도 없다. 그러나 천국에 들어가려면 순종의 길을 걸어야 한다.
선한 행실은 완전하고 궁극적인 구원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절대로 필요하며, 천국에 실제로 들어가기 위해서도 그러하다. 우리의 몇몇 친구들에게는 이런 말이 이상하게 들릴 것이며 '율법주의'적인 냄새가 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바로 성경이 그리스도는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면(히 5:9), 우리가 이처럼 분명한 말씀을 사용하고, 그 말씀을 강조하는 데에 주저할 필요가 있겠는가?
여기에서 우리가 감히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견해는, 진짜 정통파의 교리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지극히 건전한 하나님의 종들이 이전에 제기하였던 교리인 것이다. 앞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굿윈(Goodwin)과 맨턴(Manton)의 말을 인용하였었다.
이제 다른 청교도들의 말을 들어보자.
"만일 우리가 인내, 사랑, 온유함 등의 은혜로운 모든 행위를 생각해 본다면, 그러한 행위가 그들을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의로워진 사람들은 그러한 일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한 행위들은 우리가 영생에 이르기 위하여 사용하도록 정하여진 수단들이다.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거룩한 생활과 분리될 수 없다" (A. 버제스 Burgess, 1656).
"모든 믿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하나님께서 친히 명백하게 확언해 주셨다고 해서(롬 8:32, 33) 순종이 필요치 않다거나 불법이나 불순종에 대한 죄책이 가벼워진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존 오웬, 1670).
"그리스도는 자기의 왕적 권위와 율법에 진실되이 순종하는 자들만을 구원하실 것이다"(월터 마샬 Walter Marshall, 1962). 그러나 슬프게도 이처럼 훌륭한 사람들의 가르침과는 동떨어진 내용이 전파되어 왔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첫째 원리들에 대하여 무지한 상태에 있는 것은 바로 자기의 명예를 더럽힐 만한 가치도 없는 자들이 이전에는 아주 충실하고 담대하게 선포되었던 진리에서 슬프게도 돌아서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진실로 자명한 것을 상세히 논할 필요가 있게 된 것은 바로 19세기의 목회자와 전도자들과 저술가들이 하나님의 거룩의 표준을 제멋대로 낮추어 버리고, 세속적 정신에 맞게 하기 위하여 복음의 질을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뒤늦게 오늘날에 와서야, 하나님의 백성이 흡수한 반율법주의자(도덕률폐기론자)들이 독을 씻어주기 위하여 몇 장을 계속해가며 설명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Arthur W. Pink 산상수훈 p4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