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2024. 7. 28. 16:32

부당한 관용 (마 7:6)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그가 세우신 방책을 허물거나 그가 지으신 경계를 없애라는 명령은 전혀 받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완전하게' 하러 왔다(마 5:17).

다시 말하면, 율법을 증대시키고 명예롭게 하러 왔으며, 선지자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그들이 선포한 것을 성취하러 온 것이다. 나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에 실체를, 상징적인 것에 실상을, 의식에 생명을 채우러 왔다.

나는 또한 정한 것과 부정한 것 사이를 구별할 것이며,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사이에 담을 둘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우상 숭배자와 통혼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이교도들이 성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지 아니하였느냐?

또한 제사장의 가족이 취하는 음식은 '지극히 거룩하며'(레 10:12-15) 그들의 특별한 몫이나 소유는 거룩한 것이라고 선포하지 않았느냐? 그러므로 너희에게 명하노니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이제는 좀 더 가까운 문맥을 살펴보자. 우리의 본문과 그 바로 앞에 나오는 것 사이에는 분명하게 어떤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다른 사람의 눈의 '티'를 제거해 주려면 밝은 눈과 부드럽고 침착한 손 이외에 그 이상의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암시해 주고 계신다.

우리가 앞 장의 종결 부분에서 지적했듯이, 상한 눈을 가진 사람은 자기를 도와주려 할 때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과실이 있는 사람은 기꺼이 훈계를 받아들여야 힌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와는 다르게 행동한다.

그는 당신의 선의적인 제안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그것 때문에 당신을 욕할 것이다. 즉 그들은 당신의 훈계를 발로 짓밟고 당신에게 분노를 터뜨릴 것이다.

"미련한 자의 귀에 말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네 지혜로운 말을 업신여길 것임이니라"(잠 23:9).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권고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고, 권고를 받아들일 사람과 그렇지 않을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 주신다. 불량한 자를 책망하는 것은 헛수고를 하는 것이다(삼상 25:17).

5절에서 주님은 잘못이 있는 형제를 부드럽고 온유하게 대해 주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다.♡ 책망은 겸손하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기 6절에서 사랑은 분별해서 해야만 한다고 가르쳐 주신다.

즉 모든 사람이 다 '형제'인 것은 아니며, 너그럽게 책망한다 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다 그것을 받아들여 괴로워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책망하는데 있어 영적으로 자격을 갖추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우리는 우리가 도우려는 사람을 잃을 뿐 그보다 더 나쁠 것이 없다는 최악의 사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래서 악의적인 비난을 금지시킨 후에,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분별 없는 비난에 대해서도 경고하신다.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잠 9:8).

그러므로 여기에 명심해야 할 필수적인 경고가 있다. 열심은 지식과 거룩한 분별심에 의해 인도되어야만 한다.♡ 모든 사람이 다 책망받기에 적합한 사람은 아니다. 분별없는 자들은 그들의 악한 방식대로 가장 온유한 비평조차도 비웃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성경을 인용하는 것은 신성모독을 조장하는 일이 될 것이며,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과 앞 구절과의 좀 더 깊은 관계를 발견해야 한다. 성급하고 가혹한 판단을 경계하면서 우리는 또한 은혜를 남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한편으로 우리가 부당하고 무자비한 비판을 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애매하고 느슨하게 비판하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양' 뿐만 아니라 세상의 '개' 와 '돼지' 도 있으므로 그들을 각자에게 맞게 대우해 주어야 한다.

공공연히 세속적이며 분명히 현세적인 자기 교회의 일원이 되려고 지원할 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내걸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반대자들로 하여금 침묵을 지키게 한다면 그것은 아주 나쁜 일이다.

거룩한 요구를 무시하는 자에게 은혜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부정한 자들로 하여금 어린 양의 피로 씻겨진 자들을 위해 마련된 특권을 누리도록 허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잘못되었기 때문에, 즉 그리스도의 이 명령에 주의하지 않음으로써 거짓된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에 영적인 바벨론 성이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될 때까지 지극히 악한 자들조차도 하나님의 집에서 활개를 치는 것이다.

Arthur W. Pink 산상수훈 p3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