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2024. 7. 27. 15:07

다른 이를 비판하는 일 (마 7:1)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이기적인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기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너무 높게 평가하여 자기는 다른 사람의 판단을 받는 범위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도록 인도하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참된 동행자는 그와 반대이다. 그는 필요할 때에는 고침이나 책망을 받는 것을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윗과 같이 말할 것이다.

"의인이 나를 칠찌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에 기름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시 141:5).

진실로 겸손한 사람은 의인이 책망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심사숙고할 것이다.♡

"지혜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잠 9:8). 왜냐하면 그는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잠 25:12).

그러나 슬프게도 오늘날에는 청종하는 귀를 가진 자가 거의 남아 있지 아니한다. 필요한 책망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가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신실한 행동을 감사하게 여기는 한, 이것은 공중의 의견에 영향을 받아 희생되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일이다.

또한 그가 옳은 것을 행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는지 궁금해하면서 오해받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과도 전연 다른 일이다.

둘째로, 주님께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고 말씀하셨을 때 우리가 동료의 손에서 똑같은 대우를 받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을 부당하게 비판하지 말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의 뜻이 그보다도 좀 더 신성하고 엄숙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한 경고는 대다수의 신앙 고백자에게는 거의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걸어가는 자에게는 전혀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인간을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는 벗어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궁극적으로는 세속적인 것에 불과한 것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밝히려 했다는 것은(다음 구절을 주목하라).

주님의 설교의 구체적인 어조, 즉 그 설교의 세부사항의 특성과는 전혀 조화를 이루는 것 같지 않다.

한 설교에서 바리새인의 세속적인 특성과 대조하여 그리스도인의 특성인 영성을 분명히 밝히고자 하는 주된 계획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동료 인간의 변덕스러운 비판 때문에 고통받게 된다는 단순한 두려움보다는 좀 더 무게가 있는 만류하는 말을 사용하고자 하셨음이 틀림없다.

셋째로, 한층 더 결정적인 이유인데,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이 이 문제에 있어서 이 세상에서 뿌린 대로 거두리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면,

즉 다른 사람을 비방하면 우리도 비방을 당할 것이며 다른 사람을 가혹하고 비판적으로 판단하지 아니하면 우리도 그런 경험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성경 말씀의 증거와는 부합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사람들에게서 받은 대우에 적용시켜 보라. 그는 결코 다른 사람을 부당하고 무자비하게 비판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참으로 빈번히 그릇되고 잔인하게 그를 고발하였다.

그 원리를 사도 바울의 생애에 적용시켜 본다면 그것이 전혀 들어맞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바울이 비판적이고 트집을 잘 잡는 사람이며 위선적인 사람이었다면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을 쓰도록 하셨겠는가?

그러나 그는 "사방에서 비방을 당하였으며"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다(고후 4:13). 그러므로 그러한 설명이나 이론은 성경과 그리스도인의 체험이나 오늘날의 현실을 통하여 볼 때 부적절한 것이다.♡

Arthur W. Pink 산상수훈 p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