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2024. 7. 24. 17:11

염려하지 말라 4(마 5:30, 31)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30절).

첫째로, 우선 구주께서 본문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그 합당한 자리와 명예를 드렸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백합의 아름다움을 비인격적인 '자연' 이나 그 존재법칙의 산물로 돌리지 않았다. 오직 명백하게 그것을 조물주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하셨다. "피조물의 모든 탁월한 미는 그들의 원천이자 근원인 하나님에게서  니온다"(매튜 헨리).

둘째로, '하물며' 란 말을 신중하게 생각해 보자.

만일 '여호와 이레' 가 들풀과 같이 얼마 살지 못하는 비교적 쓸모없는 피조물들을 위해서도 그같이 아름다운 차림새를 베풀어 주고 있다면, 틀림없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소중한 자녀로 어떠한 유익한 것을 갖지 못한 채 지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고 계심을 알고, 그들의 염려를 그에게 맡겨버리는 일이야 말로 그들의 의무임은 너무도 자명하다(벧전 5:7). 우리는 하나님과 좀 더 밀접하고 귀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그의 사랑받는 백성이다.

셋째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이 적은 자들아' 라는 힐책을 잘 생각해 보자. 그 힐책은 우리의 지나친 염려의 밑바닥에 있는 것, 곧 불신을 드러내 주신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그의 제자들을 질책하셨다. 그가 그들을 나무라신 것은 전혀 믿음이 없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믿음의 분량이 적다는 것, 즉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보다도 불신이 더 강하다는 것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도 서로 다름을(그리고 동일한 신자의 체험도 때에 따라 다양하게 달라진다) 알 수 있다. 그 중에는 아브라함과 같이, 외적인 상황이 완전히 그에게 불리할 때에도 전혀 의심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들이 있다(롬 4:20).

반면에 그런 때 믿음이 너무나 약하고 의심으로 뒤범벅된, 같은 상황에 처하여 저 제자들과 같이 처신하는 자들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처럼 믿음이 약하다 해도, 아무리 변명의 여지 없이 비난받을 만하다 해도 그 제자들의 경우에서 분명히 보여지듯이 믿음 그 자체는 참으로 구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26절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그들의 '하늘 아버지' 라고 부르심으로써 염려하는 그의 자녀로 인정하셨기 때문이디.

여기서 한숨 돌리어, 그와 같은 믿음의 연약함이 결코 우리의 구원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아님을 집고 넘어가야 되겠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불신이 믿음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보다 불신이 우리를 정죄하는 것이 더 크다는 논리가 된다.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비록 믿음 없이는 구원될 수 없다 해도, 그렇다고 자신의 믿음 때문에 구원받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믿음의 성숙단계나 강한 정도가 아니라 의로운 대상에 매달리는 것이다.

믿음은(도구가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붙들 때에 구원해 주며, 연약한 믿음도 비록 강한 믿음과 같은 그러한 확신과 위안은 없다 할지라도 참된 구원을 베풀어 줄 수 있다.

'믿음이 적은' 것에 있는 의심과 연약함은 만일 우리가 그것에 대해 몹시 슬퍼하고 신앙을 강화시키는 수단으로 삼는다면 우리를 파멸시키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들 중 그 누구도 온전한 확신을 얻는 자는 거의 없다.

믿음이 적은 자들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비록 너희의 불신이 너희에게 짐이 되고 슬픔이 될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신다는 그 은혜로운 사실로 위로를 얻으라(사 42:3).♡

Arthur W. Pink 산상수훈 p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