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2024. 7. 5. 11:58

영화롭게 된 중보자 - 모세 5(출애굽기 34:28-35)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출 34:34, 35).

이 장의 짧은 부록으로, 고린도후서 3장의 사도의 논쟁에 대한 개요를, 그것을 중요시하는 자들을 위해 제공하고자 한다. 어떤 유대교로부터 전향한 신자들에 의하여 바울의 사도직의 권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 장의 서두에서,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이 임명하시고 또 복을 주신 그의 직분에 대한 증인이라고 호소하고 있다. 6절에서 그는 그의 직분의 성격을 정의하고 이로써 그의 대적들보다 탁월함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와 그의 복음 동역자들은 "새 계약 또는 언약의 일꾼" 이었다.

이로써 두 가지 언약 사이의 일련의 대조가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곧 유대교와 기독교였다. 전자는 '문자(율법 조문)'에 속한 것이나 새 것은 '영' 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 하나는 주로 외적인 것과 관련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주로 형제사랑에 관한 것이었다. 그 하나는 죽이는 일을 하였으나 다른 하나는 생명을 주었으니, 이것이 율법과 복음 사이의 차이점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어서 사도는 율법도 영광되지만 복음은 더욱 영광됨을 보여준다. 옛 언약은 "죽음의 직분" 이므로 율법은 다만 정죄할 뿐이었으나 그것에도 영광이 있어 육을 가진 인간은 바라볼 수 없을 정도였다(7절).

그렇다면 이 새 언약의 영광은 "영의 직분"(8절)이므로 - 3절과 비교하여 그 증거로서 - 얼마나 더 우수하며 또 마땅히 그리해야만 하는가? 만일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둔 것"(갈 3:22)에 영광이 있었다면,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롬 3:22)를 선포하는 직분은 더욱더 영광스러워야만 한다.

정죄하는 것보다 용서함이, 멸하는 것보다 생명을 주는 것이 더 영광되다(9절). 그러므로 전에 있었던 언약의 영광은 후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10절). 이것은, 유대교는 "없어질 것" 임에 비하여 기독교는 "길이 남을 것"(11절)이라는 사실에 의하여 더욱 깊이 보인다(히 8:7,8 참조).

12절에서, 사도는 두 섭리 사이의 또 다른 대조를 제시함으로써, 소위 그들의 각각의 직분(12-15절)의 애매함과 모호성에 대하여 분명함과 명료성을 구분한다. 사도는 '매우 분명한 언사" 를 사용하였지만, 그 반면에 의식법에 대한 가르침은 단지 그림자와 상징의 수단에 의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어두워 듣는 자가 가려져 있었으므로, 그들이 모세의 글을 읽을 때 그 원형의 모형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보지 못했다. 이 수건은 오늘날까지 그들을 가리고 있으며,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때까지 계속 가려져 있을 것이다(15, 16절).

문자적으로 시내 산 언약은 정죄와 죽음의 직분이었기에, 그 영광은 가려져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에는 어느 날에 '마침' 이 있었는데(13절), 이스라엘은 그들의 눈을 거기에 고정시킬 수 없었다. 그들은 다가올 날에 그 '마침' 을 볼 것이나, 우리는 그 동안에 옛 언약을 수건 없이 보도록 허락되었고,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것에 '영' 이 되심을 알게 되었다.

또한 우리에게는 새 언약의 조건(중보자 안에서 또 그에 의하여 보장되는 하나님의 영광) 아래에서 오직 그 성취가 이루어질 것이 계획된 것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다.

"주는 영이시니" 라고 말씀한 17절은 다소 모호한 말처럼 여겨진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이라는 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영' 은 6절과 동일한 것이다 -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라"(비교, 롬 7:6).

모세의 체계는 순전히 객관적이었기에, "율법 조문" 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내적인 원리나 능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복음은 심령을 다루며 영적인 힘을 제공해 준다(롬 1:16).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영이시요, 생명이며 유대교의 모든 의례와 의식주의의 심장이며 핵심이 된다.

그가 구약성경의 열쇠가 되심은 "두루마리 책"이 그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리스도는 영이시요 기독교의 생명이며, "살려 주는 영"(고전 15:45)이다. 그리고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죄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든 간에 얽매인 상태에 있다. 그래서 그는 죄의 종이요 마귀의 포로이다. 그러나 이들이 자유하게 하는 곳에서, 사람은 참으로 자유가 있다(요 8:32).♥

마지막으로 사도는 두 영광, 곧 옛 언약과 연결된 영광 - 율법을 증여할 때 모세의 얼굴에 있는 빛(언약을 맺었을 때) - 과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있는 새 언약의 영광을 대조하였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첫째, 여기서 "우리가 다" 라고 한 말을 보자. 모세는 혼자서 여호와의 영광을 산에서 보았지만, 지금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본다.

둘째, 우리는 "벗은 얼굴", 즉 자유와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반면에 그때의 이스라엘은 빛나고 위엄 있는 모세의 얼굴 보기를 두려워하였다.

셋째, 우리는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였다." 율법은 회심하게 하거나 정결하게 하는 능력이 없지만, 성령님의 운행 아래 있는 복음의 직분은 변형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에 의하여 구원받은 자, 즉 말씀(거울)이 제시해 주는 바 그리스도에 의하여 사로잡혀 있는 자들은 조금씩, 그의 형상을 닮아간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때"(요일 3:2), 우리는 온전히 그리고 영원히 "그와 같게 될 것이다.♡

Arthur W. Pink 출애굽기 강해 p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