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odus 370]
영화롭게 된 중보자 - 모세 2(출애굽기 34:28-35)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출 34:28).
이 구절은 풍부한 비교와 대조로 가득하다. 여기에 있는 '40일' 일은 즉시 마태복음 4장에 기록된 '40일' 을 회상케 한다. 여기서는 모세가 그리하였고, 거기서는 그리스도께서 그리하셨다. 여기서는 모세가 산에 있었고 거기서는 그리스도께서 광야에 계셨다.♥
여기서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스러운 계시를 받는 은총을 입었고, 거기서는 그리스도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여기서는 모세가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율법을 받았고, 거기서는 그리스도께서 그 율법을 거절하도록 마귀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그 땅에 있는 죄 많은 벌레와 다름없는 자가 그러한 높은 영예의 자리에 올림을 받아 위대하신 여호와의 임재에서 한 계절을 보내도록 허락하심을 받은 일과 그 영광의 주께서 6주간이나 그 불결한 마귀와 더불어 그렇게도 낮은 곳에 처하셨던 이 두 가지 일 중 어느 것이 더 큰 이적인지를 알기 어렵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나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출 34:29).
모세의 이 두 번째 하산과 우리 앞에 있었던 32장의 사실을 비교하여 대조해 보는 것은 참으로 매우 복된 일이다. 거기에서는 모세의 얼굴에 노기가 등등했던 것을 볼 수 있으나(출 32:19). 여기서는 그가 빛나는 모습으로 내려왔다.
거기서 그는 백성들의 우상 숭배를 보았으나 여기서 그가 돌아왔을 때는 백성들이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거기서는 그가 두 돌판들을 땅에다 던진 것을 보았지만(출 32:19), 여기서는 궤 속에 보관하였다(신 10:5).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이는 또한 매우 닮은 것 같으나 실은 아주 다른 신약 성경의 어느 사건(episode)을 회상케 한다.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난 곳은 산이었고 우리 주께서 변형되신 곳도 산이었다. 그러나 모세의 영광은 반영된 것에 불과했으나, 그 반면에 그리스도의 영광은 원래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모세의 얼굴이 빛났던 것은 그가 영광의 여호와의 임재에 직접적으로 대면했던 결과였으나 그리스도의 변형되심은 그가 친히 소유하신 영광의 발산이었다. 모세의 광채는 그의 얼굴에만 한정되었지만 그리스도의 것은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마 17:2).
모세는 그의 얼굴이 피부가 빛났음을 알지 못했지만, 그리스도께사는 알고 계셨으니 이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마 17:9)고 하신 말씀이 이를 증거한다.
이 29절 말씀은 여호와와 대면하여 교제한 확실한 결과가 무엇인지를 매우 복되게 드러내는데, 그런데 그것을 두 가지 방법으로 제시한다. 첫째, 어떠한 생명도 그것으로 인한 영향을 받지 않고는 모든 영광의 하나님과 참다운 교제를 즐길 수 없고, 어느 정도의 흔적이 있다.
모세는 그가 받은 교제 속에 몰입되었고, 그리고 그와 더불어 말씀하시는 이의 영광을 주시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이 그 영광의 광채에 사로잡혔고 그리고 그 광채가 계속 유지되었다. 시편 34:5에서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R.V.)라고 말한다. 우리로 하여금 그의 형상을 이루게 하는 것은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와 더불어 더 자주, 더 가까이 행하기 전에는 더욱더 그리스도를 닮을 수 없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의 두 번째 결과로 우리는 자신의 비참한 자아에 덜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모세의 얼굴이 빛난 것이 "땅에서나 바다에서 볼 수 있는 빛" 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이것은 자기 의를 내세우는 바리새주의와 참 경건 사이의 치명적인 차이를 예시해 주는데, 전자는 자기만족과 교만을 나으며, 후자는 자기희생과 겸손을 낳는다.
바리새인(그리고 아직도 이 땅에 남아 있는 그 족속)들은 그가 성취한 것들을 자랑하며 그의 허상적인 영성(spirituality)을 광고하며, 자기네들이 다른 사람들과 같이 부패했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러나 은혜로써 주님과 더불어 많은 교제를 누린 자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자에게 의지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영광을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시 115:1)라고 말한다.
여호와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혀서 그는 자기 아집에서 벗어났으며, 의식하지도 못한 채 성령의 열매, 바로 그것이 풍성히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나날이 닮아가는 것을 알지 못하나, 다른 이들은 알게 된다.♥
Arthur W. Pink 출애굽기 강해 p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