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odus 361]
하나님의 요구 2(출애굽기 34:18-21)
우리는 '무교병' 그 자체가 강조하는 것과 그것으로 이스라엘이 실제로 절기를 지키는 것이 상징하고 있는 것 사이를 구별해야만 한다. 그 떡은 거룩히 지명하심을 받은 자의 상징이 되는데, 그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요 6:51)고 선포하셨다.
그의 인격이 거룩하시므로 무교병을 드리도록 명하셨다. "너희는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출 12:15).
만일 하나님께서 옛날 백성들에게 그의 복된 아들의 흠 없는 몸을 정확히 나타내기에 적합한 그러한 떡만을 사용하도록 지시하셨다면, 오늘날 우리들은 무슨 권리로 '주의 만찬' 에 쓰이는 떡이 별로 특별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만찬' 은 주께서 친히 그가 죽음에 이르러 그의 백성에게 그를 기념하도록 제정하신 것이다. 그가 지명하신 상징에 관해서, 우리가 만일 성서에 굴복한다면 의문시할 추후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먼저 그 떡이 무교병이었다는 것은 이 '만찬' 이 유월절 바로 다음에 제정되었다는 사실을 보아도 분명하다(마 26:29).
- 이는 그들의 집에서 모든 누룩을 엄격하게 제거했던 때였다. 두번째는 포도주를 담은 '잔' 이었다(마 26:29). 사도 바울은 이 일을 고린도 사람들에게 다시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이(다른 것과 별로 다른 바가 없는 떡이 아니라)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고 썼다.
오호라! 타협하며, 기록된 말씀으로부터 떠난 오늘날의 부주의한 세대 안에서는,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것에 대한 인간의 대체물이 아무런 불평 없이 거의 모든 장소에서 공공연하게 받아들여진다.
밀가루를 얻기 힘든 중앙아프리카의 어떤 토속 교인과 그들의 백인 선교사들은 코코넛을 떡 대신에 쓰고 우유를 잔에 넣어 사용한다. 우리에게 알려진 바로는 오스트레일리아 다른 한 무리의 산딸기 즙을 사용한다.
그것뿐인가? 만일 우리가 누룩 없는 떡을 누룩 있는 것으로 바꾸는 것을 정당한 일로 여기고, 덩어리에서 떼는 대신 사각으로 빵을 잘라서, 우리를 위하여 상하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생각하고, 또한 저녁에 지키는 절기인 '만찬' 을 아침의 성례로 고친 것 등은 성서의 그 어디에다 근거를 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개인적으로 필자는, 성경에서 언제나 죄의 상징으로 여기는 것이 그 속에 들어 있는 빵을 가지고 복된 그리스도의 인격을 나타내고자 하는 죄가 되는 모임에 참여하느니보다는, 아예 성만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만일 상 위에 있는 떡이 조금이나마 모형적 중대성을 내포하고 있다면, 누룩이 든 빵은 그리스도를 부패한 인성을 가진 자로 묘사하는 것이요 그러한 것은 거룩한 성경이 말씀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우리는 그럴듯하게 주장하는 반대, 즉 그리스도로부터 마음이 멀어질까 두려워서 소위 상징에 불과한 일 자체에 너무 가깝게 사로잡힐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그 반대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그러한 언사는 매우 경건한 것처럼 들리지만 그러한 것들을 사용하는 자들에게는 나쁜 결말을 가져다준다.
이와 똑같은 반대가 침례를 거절하는 많은 유아세례 주장자들에 의하여 야기된다. 그들은 말하기를 외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행하는 배후의 장신이 중요하다고 한다. 우리 주님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감히 어떤 다른 일을 행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만일 외형적 상징들이 그다지, 아니면 전혀 중요하지 않다면 '퀘이커 교도(Quakers)'를 견실한 자들로 여겨 그들을 따라 외형적 성례를 모두 버리는 것이 어떤가? 우리는 다른 때가 아니라 그분의 식탁 주위에 모였을 때에 그를 '기념'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친히 지정하신 것들을 엄격히 집착할 때에만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여주게 된다"(고전 11:26).♥
그리고 우리의 순종은 여기에 있으니, 성막에 관한 일은 비록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모든 것을 산에서 보여준 식양대로 할지니라" 고 하시지 않았던가? 또 여전히 이르시기를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라고 하셨다.
다른 이들은 반대하기를, 만일 당신이 주님의 상에 사용되는 특별한 떡에 대하여 그렇게 까다롭게 따진다면 우리가 마치 맨 처음 제자들이 한 것과 같은 근거에서 '다락방' 을 선택하고, 만찬에 참석하는 자들로 실제로 강요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에 대한 대답은, 이러한 내용의 물음은 만찬의 중심적 계획에 속한 '주님의 죽음' 을 전하는 일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에 대해서는 떡과 잔에 대하여 거론하는 고린도전서 11장에서 특별히 언급한 바가 없다.
사도가 거기에 그러한 일을 언급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유의하고 지켜야 할 의무 아래 놓이게 되겠지만 사도는 그러한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실제로 이러한 반대는 한가한 한담에 불과하다. 주의 상을 준비하는 일을 맡은 자들은 그의 임재 앞에서 기록된 말씀에 유의하자.
그들은 유교병과 무교병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성서적인지 물어보라. 그 중에 어느 것이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격의 표상에 더 적절한가? 어느 것이 은혜로 말미암아 범사에 말씀에 복종하기를 원하는 그의 백성들에게 고민과 거침이 가장 적은 것으로 간주되는가?
Arthur W. Pink 출애굽기 강해 p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