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2024. 7. 4. 11:36

지극한 자비 2(출애굽기 33:18-23)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만일 이 구절과 그 앞에 있는 구절 사이의 관계를 살펴본다면, 우리가 명심해야 할 기도에 대한 또 다른 값진 교훈을 배우게 될 것이다.

앞 구절에서 이르시기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네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고 한다. 모세는 여호와께 두 번 간구를 드렸는데, 처음에는 그의 백성들을 소멸하시지 말도록 구하였고 그 다음에는 그가 계속하여 그들 가운데 임재 해 계실 것을 구했다.

이 간구들은 모두 은혜롭게도 허락하심을 받았다. 모세는 그의 성공으로 만족하는 대신 담대함을 얻어 더 큰 간구를 드렸다. 여호와의 응답이 말해 주듯이, 그는 그의 종의 집요함에 대하여 불쾌하게 여기지 않으셨다.

기도로써 "우리가 왕에게 나아갈 때에" 이 사실을 기억하여 "큰 간구를 가지고" 그에게로 나아가자. 이렇게 하는 것이 그를 존귀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출 33:19).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선함' 이요, 그의 '선함'은 그의 '영광' 이 됨을 여기에서 배우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렇다면 여호와의 선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오, 이 놀라운 물음에 감히 답하리오! 인간의 정의는 무의미한 것이로다.

그의 '선함' 이란 그의 어떠하심, 그의 인격의 모든 탁월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다음에 말씀하신 구절에서 우리의 이 물음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친히 대답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모세에게 하신 약속도 성취하셨다.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6,7).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출 33:9).

이것은 불붙는 떨기나무에서 그가 모세를 처음 부르실 때 먼저 선포하신 것을 새롭게 하며 확증하는 것이 아닌가?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라고 한다.

하나님이 대답하시기를,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출 3:14, 15).

"나는 은혜 베풀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

이 말씀은 성경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위로에 대한 참으로 소중한 진리 중에 하나를 제시하고 있지만, 오늘날 이를 오해하는 이는 매우 적다. 디모데후서 2:15에 하나님의 종에게 분부하시기를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grace)와 하나님의 자비(mercy) 사이를 "옳게 분별" 할 수 있는 자들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것들을 시실상 동의어로 여기는가? 다른 것들 사이를 분별하지 못하고 또 분명히 구별된 것들을 우리의 생각 속에서 혼돈하고 있음은 얼마나 손실이 많은가?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결코 혼돈하는 일이 없으며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큰 손실이 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두 가지 속성을 언급하신 순서가 그것들 사이를 구별하게 하는 열쇠를 제공해 주는데, 하나님의 '자비' 는 '은혜' 다음에 온다. 왜 그런가?

이는 자비란 그의 은혜를 보답하는 일에 실패한 그의 백성들의 절실한 필요에 대처한 하나님의 기이한 예비하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출애굽기 33장에서 참으로 복되게 나타나 있다. 애굽에서 시내 산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순수한 은혜에 근거하여 다스리셨다.

그들은 본질상 애굽인들보다 조금도 나은 것이 없었지만 하나님은 그의 지극한 인자함으로 그들이 얽매였던 집으로부터 이끌어 내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시며, 그에게로 그들을 구별하시고, 광야에서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셨다.

그러나 그러한 은총과 축복들에 대하여 그들은 어떻게 보답하였나? 그들은 그를 대적하고 거역하여 그가 계실 자리에 한 우상을 세웠다. 그러했을 때 그들의 상태는 절망적이었던가?

그들이 '통곡' 하고 그들의 장신구를 제하고 장막에서 그의 임재를 나타내신 상징 앞에 엎드려 절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은총을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였던 그들과 함께 더 이상 나아갈 수 있었겠는가?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모형적 중보자는 너무도 가증된 죄를 범한 그 백성들을 위하여 간구하였다.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성경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아니한 그의 복된 성품에 대한 계시를 나타내 보이셨다.

여기에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성품은 일찍이 나타낸 일이 없는 소위 하나님의 자비의 진정한 깊이였다. 이에 대한 소중한 말씀들에 대한 언급이 창세기에 있음은 사실이겠으나 그것의 의미에 대한 충분한 해석은 거기에서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심오하고 복된 계시는 여기 출애굽기 33장에서 너무도 풍성하게, 너무도 상세히, 그리고 복되게 나타나 있다. 인간의 궁지는 하나님의 기회가 되었다. 거룩한 은혜의 넘침은 남용되었고, 그의 공의로운 율법은 파기되었으며, 시내 산의 언약(출 24장)으로 맺은 유대관계는 이스라엘의 반역에 의하여 단절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지극하고 절대적인 '자비'는 그가 스스로 물러나서 자신으로부터 행하는 그분의 자원이었다. 즉 오직 자비를 실행함으로써 죄를 지은 이스라엘은 멸망 받아야 마땅한 상태에서 해방되었다.

Arthur W. Pink 출애굽기 강해 p6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