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2024. 7. 3. 11:14

의로운 재판관 4(출애굽기 32:15-27)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출 32:24).

그들이 금으로 만든 장신구들과 단절되는 것은 그들의 영광을 벗김에 대한 하나의 모형이었다. 우상 숭배가 진행되는 곳에는 항상 그러했다.

인간의 '영광'은 무엇인가? 그들을 만드신 이에게 순복하고 그의 자비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그분 자신의 진정한 장소가 주어질 때, 인간은 오직 영광을 받게 된다. 이는 로마서 1:21에 이방인들에 대하여 기록한 것과 같다.

즉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한다."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했는가?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등등. 하나님 권위 앞에 부복한 의지와 그의 관대하심에 대한 감사로 고양된 심령만이 우상 숭배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다.♥

만일 내가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이지 아니하면, 나는 신속히 어떤 피조물에게 부복하게 될 것이고, 그러므로 나의 '금' , 나의 영광은 벗겨지는 것이다.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이러한 모호한 방법으로 아론은 그 사건에 대한 모든 개인적인 책임을 부인하려고 한다. 사실, 출애굽기 32:4을 참고해 보면, 그는 완전히 거짓말을 했다. 그의 죄는 참으로 중하였지만 그것을 사해준 것은 놀라운 은혜이다.

민수기 9:20에서 알게 되듯이, 아론의 생명이 모세의 간구의 응답의 결과로 연장되었다고 하는 것은 복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다시, 우리의 모형적으로 그분의 백성을 위한 중보자의 간구의 효과를 알게 된다.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을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이에 모세가 진 문에 서서 이르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이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출 32:25, 26).

그 상황은 격렬한 행위를 야기시켰다. 아론의 죄상을 추궁하고 나서, 모세는 이제 백성들의 상태를 숙고하고, 그리고 그들이 나체로 문란하게 행하는 것을 주목하였는데, 이는 애굽에서 너무도 자주 목격했던 바 있는 우상적 관능주의에 탐닉했던 것이며, 그리고 그들의 미친듯이 흥겨운 소란은 의심할 여지 없이 많은 탄식을 하게끔 했다.

그들은 가증스런 주연 중에 당황하였고, 그리고 모세가 출현한 공포감에 단지 굴복하였다. 그러므로 남은 자들의 분별과 회개를 도모하기 위하여, 신속하고 즉각적인 보복이 그들에게 내려져야 하지만, 그의 간청에 의하여 거룩한 진노가 연기되었고 그 민족을 완전히 소멸하는 일로부터 돌이킬 수 있었다.

"누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인가?" 그것이 이제 문제였고, 분명히 규정되었다. "그때는 악을 은폐하거나 타협할 수 있는 때가 아니었다. 공개적인 배교가 있을 때에는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대한 문제가 있을 때 중립 그 자체가 배교이다.♡

그러한 때에 여호와와 함께 하지 않는 자는 그를 대적하는 자다. 그리고 더욱 주의해야 할 것은 이 외침이 여호와를 고백하였던 백성들 가운데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구별이 있어야만 했으며, 그리고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가 누구냐?" 라는 모세의 도전은 모든 것을 드러나게 한다. 그는 여호와의 편의 중심이 되었으니, 그러므로 그에게로 모이는 것은 여호와를 위한 것이었고, 그의 초청을 부인하는 것은 여호와를 거역하는 것이었다"(Ed. Dennett)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가는지라"(출 32:26).

레위 족속들은 그날에 "이기는 자들"(계 2, 3장) 이었다. 그들은 분명히 그들 나라의 무서운 죄악으로부터 보호되었고, 이제는 하나님의 종의 부름에 즉각적으로 응하였다. 참으로 엄중하고 혹독한 시련이 그들 앞에 봉착되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서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출 32:27).

그러한 명령을 맹종하기에는 본능적으로 움추려질 것이다. 어떤 이들은 감상적으로 이르기를 "그러지 마세요, 우리가 관대하고 은혜롭게 됩시다. 가혹하게 다루는 것보다 친절하게 하면 일이 잘 완수될 것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사람을 죽여서 좋을 것이 무엇인가, 사랑 속에는 칼보다 훨신 위대한 힘이 있지 않은가, 가서 그들에게 호소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합시다. 그러한 주장은 매우 타당한 것 같으나 분명하고 결정적으로 그 부르심은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라" 라고 했다.

송아지의 형편상 그밖에 별다른 것은 없었다. 이와 같이 오늘날 우상 숭배자들에 대한 설교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이지 그의 사랑(그의 친 백성에게만 해당하는 진리)이 아니다. 어떤 이가 오늘날 성도들에 대한 이 구절의 적용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어떤 대가를 부릅쓰고도 거룩한 요구에 순종하는 것이었고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빠졌던 악으로부터 완전한 분리였다. 하나님은 때때로 같은 방법으로 그의 백성들을 시험하시는데, 언제나 혼란과 타락이 시작될 때면 경건한 자들이 가야 할 유일한 길은 레위 족속들이 지나간 경로에 - 전심으로, 불문의 순종으로 - 의해 표시된다.

그러한 길은 반드시 고통스럽고, 그들의 삶에 있어서 매우 친밀한 관계의 포기와 자연스런 많은 유대관계, 곧 혈연과 친척관계의 파탄을 초래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유일한 축복의 길이다.

만일 이 사악한 시대에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그 모든 일들로부터 떠나 그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많은 것이 그들의 마음에 도전할 것이다. 그 무서운 결과는 다음 장으로 미루어야만 하겠다.

주께서 우리 앞에 있는 성경 구절들이 내포한 엄숙하지만 유익한 교훈들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성결하게 해주시기를 바란다.♥

Arthur W. Pink 출애굽기 강해 p6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