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시리즈/다윗의 생애 (Life of David)

[The Life of David 68]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이함(사무엘상 25장)

En Hakkore 2024. 2. 19. 11:20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나발의 경우는 부주의하고 경솔하고 무모한 죄인에 대한 엄중한 본보기일 뿐 아니라 - 그런 자는 자기 머리위로 하나님의 심판의 칼날이 내려오고 있는 동안에도 육체의 쾌락에 탐닉하다가 하나님에 의해 갑작스럽게 죽는다 -

또한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 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롬 12:19)는 말씀의 증거를 볼 수 있는 경우이기도 하다.

성도가 부당하게 모욕을 받거나 나쁜 취급을 당할 때 스스로 복수하려는 것은 죄일 뿐 아니라 전혀 불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적당한 때가 되면 하나님이 그를 위해 훨씬 더 효과적으로 복수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나발이 죽었다 함을 다윗이 듣고 이르되 나발에게 당한 나의 모욕을 갚아 주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의 머리에 돌리셨도다 하니라"(삼상 25:39a)

이것은 다윗이 자기에게 잘못을 저지른 자의 비참한 죽음 앞에서 경건하지 못한 기쁨을 느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영광, 그분의 공의의 행사, 그리고 무도함에 대한 경건함의 승리가 드러난 것을 기뻐했다는 의미다.♡

여기에는 오늘날 많은 이들이 -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구약 시대에 경건함의 기준을 오늘날의 그것보다 낮춰놓기라도 하신 듯 말한다 - 단지 복수심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여기는 여러 성경 구절들을 해석하기 위한 중요한 열쇠가 들어 있다.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율법은 복음과 동일하게 이웃에 대한 사랑을 요구한다.

그동안 이 주제는 "세대주의자들"(Dispensationalists)에 의해 안타깝게 왜곡되어 왔다. 따라서 여기에서 그것과 관련해 몇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시편에 나오는 "의인이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의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시 58:10)는 말씀을 예로 들어보자.

말씀을 피상적으로 읽는 사람들은 "그것은 이 세대의 정신과 완전히 반대되지 않는가!" 하고 말한다. 그러나 그 시편을 계속해서 읽어보자. "그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10절).

의인들이 자신들의 적들의 파멸을 보며 기뻐했던 것은 그들 안에 있는 적대적인 정신 때문이 아니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명령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잠 24:17).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숭배하며 사악한 자들에게 그들의 몫을 돌려주시는 분의 공의를 찬양하는 마음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완전히 감상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걸핏하면 눈물로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면, 오늘날에도 누군가 아주 악한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손길에 의해 분명하게 제거되는 것을 보면 기뻐하기 마련이다. 이 세대가 끝날 때도 그러할 것이다(계 18:20; 19:1-2을 보라).

다음 구절로 넘어가기 전에, 다윗이 하나님의 제어하시는 은혜를 깨닫고 감사했던 것에 주목해 보자. "나발에게 당한 나의 모욕을 갚아 주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삼상 25:39).

만약 우리가 매일의 삶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를 제어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탄복해야 할 경우를 자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 우리는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아름다운 예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했던 말을 반복해야 할 것이다.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시 107:43).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롭게 제어하셔서 우리가 생각했던 악을 행하지 않게 하실 때, 우리는 잊지 말고 그분을 찬양해야 한다.💕

청원과 수락

"다윗이 아비가일을 자기 아내로 삼으려고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말하게 하매 다윗의 전령들이 갈멜에 가서 아비가일에게 이르러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당신을 아내로 삼고자 하여 우리를 당신께 보내더이다 하니"(삼상 25:39-40).

하나님의 심판의 일격으로 인해 아비가일은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해방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분은 그녀의 의(義)에 보답하시기 위해 섭리를 통해 역사하셨다. 하나님은 그녀가 자신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눈에 들게 하셨다.

다윗은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와 신중한 처신뿐 아니라 그녀의 확고한 신앙으로 인해 - 이것은 아내가 갖춰야 할 모든 자질 중에서도 가장 귀한 것이다 - 그녀에게 매혹되었다. 이제 아비가일은 과부였고(38절), 다윗의 아내는 다른 남자에게 보내진 상태였기에(44절), 다윗은 전령을 보내 아비가일에게 청혼했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주 예수님은 자신의 신부에게 직접 구애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죄인들을 자신에게로 이끌기 위해 복음의 사역자들을 사용하신다.

"아비가일이 일어나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이르되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전령들의 발 씻길 종이니이다 하고"(삼상 25:41).

그토록 부유한 여자가 다윗의 구애를 받아들이며 큰 절제와 겸손을 보이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녀는 자신을 그런 명예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로 여겼다. 그녀는 다윗을 너무나 존경했기에 자기가 그의 가족의 가장 미천한 종들 중 하나가 될지라도 기뻐할 참이었다.

그녀는 다윗의 청혼을 수락했고, 그것을 통해 회심의 예표적 모습에 한 가지 요소를 추가했다. 역대하 30장 8절의 난외주(欄外註)에서 믿음이 어떻게 "여호와께 손을 내드리는 것"으로 표현되는지 주목하라(한글 성경에는 이 난외주가 없다-역주)

"아비가일이 급히 일어나서 나귀를 타고 그를 뒤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전령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삼상 25:42).

이 말씀은 아주 복되다. 그때 다윗은 집조차 없는 방랑자이자 망명객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아비가일은 자신의 집과 편안한 지위를 모두 포기했을 뿐 아니라, 기꺼이 그의 시련에 동참해 그를 위해 역경을 견디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가간이 짧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믿었고(30절), 때가 되면 자기가 다윗과 함께 다스릴 것을 확신하면서 믿음으로(in faith) 그와 결혼했던 것이다. 참된 회심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것은 옛 생활에 대해 등을 돌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릴 각오를 하고, 믿음을 갖고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다.👏

"다윗이 또 이스르엘 아히노암을 아내로 맞았더니 그들 두 사람이 그의 아내가 되니라 사울이 그의 딸 다윗의 아내 미갈을 갈림에 사는 라이스의 아들 발디에게 주었더라"(삼상 25:43-44).

일부다처( 一夫多妻)는 자연법이나 하나님의 법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타락한 시절의 일반적인 풍습이었다. 그리고 몇몇 선한 사람들까지도, 비록 그로 인해 칭찬을 받을 수야 없겠지만, 그런 풍습을 따르고 있었다.

다윗은 이스르엘 아히노암을 그리고 훗날 다시 여러 명을 아내로 맞아들임으로써(삼하 3) 그 시대의 부패한 풍습을 따랐다. 그러나 이런 풍습은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께서 개혁의 시기를 선도하신 이후로는(마 19:4-6) 전혀 허용되지 않고 있다.

Arthur W. Pink 다윗의 생애1 p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