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시리즈/다윗의 생애 (Life of David)

[The Life of David 61] 나발에게 모욕당함(사무엘상 25장)

En Hakkore 2024. 2. 19. 05:01

하나님은 우리에게 육신의 연약함에 대해 가르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갖고 계시다. 그런 방법들 중 하나가 우리 앞에 놓인 사건을 통해 분명한 조명을 받는다. 그리고 의심할 바 없이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각자의 삶의 경험을 통해 고통스럽게 인식해 왔을 것이다.

우리는 큰 위기에 처했을 때 강한 믿음을 갖고 버틸 수 있었다. 반면에 사소한 시험에 처했을 때 쉽게 무너져 세상 사람들과 동일하게 행동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오만함을 무너뜨리시고, 우리의 자족감을 억누르시고, 우리로 하여금 보다 실제적이고 지속적으로 그분을 의지하게 하신다.💕

포도원을 망치는 것은 "작은 여우"(아 2:15)다. 그리고 우리의 참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일상생활의 보다 사소한 문제들 - 가령 실패했을 때 자신을 낮추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의 연약함을 인내하는 것 등 -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다.

자신의 목숨을 노렸던 왕에게 그토록 온유하게 대응했던 자가 한 농부가 자기 사람들에게 약간의 음식을 제공하기를 거부했을 때 그토록 격노하리라고 그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토머스 스콧(Thomas Scott)이 옳게 지적했듯이,

"다윗은 사울에게서 아주 심하게 박해를 받았을 때 분노와 복수심을 갖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나발에게서 그토록 수치스러운 말과 오만한 대접을 받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는 완전히 조심성을 잃어버렸고, 크게 분노해서 스스로 복수하기로 결심했다."

사랑하는이여, 이것을 명심하라. 우리는 보다 큰 시험을 이겨낸 후에 작은 시험에 넘어가기 쉽다. 어째서 그런가? 그때 우리는 자신에게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덜 의식하기 때문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는 군인들 앞에서도 용감했지만. 나중에는 어느 하녀 앞에서 두려움에 빠졌다. 그건 그렇고, 이제는 우리의 본문의 내용을 좀더 상세히 살펴볼 차례다.

사무엘의 죽음

"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두고 슬피 울며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한지라"(삼상 25:1a).

종종 사람들은 살아 있을 때에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크게 슬퍼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에 대해 감사하던 때가 있었다. 특히 그들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압박당하고 있을 때 그랬다. 그러나 보다 최근에 그들은 사무엘의 말을 가볍게 여겼다(삼상 8장).

그들은 선지자보다 왕을 선호했다. 그러나 이제 사울 왕은 아주 실망스러운 존재임이 밝혀지고 있었다. 사울과 다윗의 불화는 치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다.

"다윗이 일어나 바란 광야로 내려가니라"(삼상 25:1b).

다윗 역시 그 백성들 대부분에게 사무엘만큼이나 가볍게 취급되고 있었다. 한 때 그는 그들이 칭송하는 영웅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떠돌이 망명객에 불과했다. 그를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무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자신이 전보다 더 큰 위험에 빠졌다고 생각했으리라.

그 선지자는 사울보다는 자기에게 더 우호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는 이제 사울의 적대감이 전보다 더 통제되지 않으리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온 이스라엘 무리"가 사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틈을 타 엔게디를 떠나 다른 지역에 가서 한 동안 체류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바란 광야로 내려가니라"라는 말에 담겨 있는 불길한 암시에 유의하자.

바보에 대한 아첨

이제 다윗이 도움을 요청했던 인물에게 주목해 보자(삼상 25:2-3). 성경이 서술하는 그의 인물됨을 살펴보면 그에게서 큰 선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의 이름은 "나발" 이었는데, 그것은 "바보"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자기가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더 큰 바보는 없다.

그는 갈렙의 후손이었다. 여기에서 이 사실이 언급되는 것은 그의 악함을 더욱 크게 보이게 한다. 우리는 이 사람이 "심히 부했다"(2절)는 말을 듣는데 이것은 그가 경건이 아니라 물질적 소유욕에 있어서 심히 부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아주 많은 양과 염소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용모가 아름답고 "총명했다"(3절).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랬다면 그가 자기 딸을 물질적 부 외에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사람에게 시집보내지 않았으리라. 참으로 가련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완고하고 행실이 악한" 자에게, 즉 탐욕스럽고 욕심 많으며 심술궂고 성미가 까다로운 자에게 묶여 있었다.

"다윗이 나발이 자기 양 털을 깎는다 함을 광야에서 들은지라 다윗이 이에 소년 열 명을 보내어 그 소년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갈멜로 올라가 나발에게 이르러 내 이름으로 그에게 문안하고"(삼상 25:4-5).

양털은 그 지역의 중요한 생산품이었기에 양털 깎는 시기는 그 지역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때였다. 많은 양떼를 갖고 있던 나발은 그런 때에는 여분의 일꾼들을 고용하고 많은 식량을 예비해 둘 필요가 있었다.

사무엘하 13장 23절을 보면, 그 무렵에는 양털 깎는 일을 축제 및 오락과 결합시키는 것이 풍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또한 이것을 창세기 38장 13절과도 비교해 보라). 이때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다른 이들에게 환대와 친절을 베푸는 시기였다.

나는 다윗이 하나님 앞에 자기의 필요를 아뢰는 것보다 사람에게 호소하는 일에 얼마나 유능했는지에 대해서는 단언하지 않겠다. 무언가를 그것의 결과를 근거해 추론하는 것이 늘 안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네게 양 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해하지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네 소년들에게 물으면 그들이 네게 말하리라 그런즉 내 소년들이 네게 은혜를 얻게 하라 우리가 좋은 날에 왔은즉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하더라 하라"(삼상 25:6-8).

다윗이 나발에게 했던 요청은 소위 세상 사람들이 "정중하고 재치 있다"고 말할 만한 것이었다. 평강에 대한 인사는 다윗의 우호적인 마음을 나타냈다. 또 그의 요청은 나발에게 과거에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그의 양떼를 괴롭히지 않게 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의 침략자들에게 약탈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라고 지시했던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14-17절 내용을 참고하라).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의 봉사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는 대신 나발에게 호의를 간청했다. 그는 나발이 자기 사람들에게 약간의 식량을 제공하는 일을 거부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때는 "좋은 날", 즉 손님에게 베풀 것이 많은 때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마치 그에게서 아버지다운 친절을 얻기를 희망하는 양 자신을 "아들"의 위치로까지 낮췄다.

그러나 이 말을 좀더 면밀하게 살펴본다면,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얄팍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 안에 영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더구나 나는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이라는 본문 6절 서두에 대한 매튜 헨리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발처럼 부하게 사는 자들은 참으로 이 세상의 풍성한 부를 누리며 산다. 그러나 사실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은 것이다"(딤전 5:6). 내 생각에 다윗은 나발을 "부하게 사는 자"라고 불렀던 것은 그에게 돌리기에는 지나친 찬사였다. 다윗은 좋은 것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의 생명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것이지 이 세상의 미소 속에 있는 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그토록 거친 대답을 얻음으로써 자신이 그런 구두쇠에게 지나치게 매끄러운 아첨을 한 것에 대해 충분한 대가를 치뤘다.🥺

Arthur W. Pink 다윗의 생애1 p2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