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시리즈/다윗의 생애 (Life of David)

[The Life of David 34] 아둘람 굴에서(사무엘상 22장)

En Hakkore 2024. 2. 17. 10:22

사무엘상 22장의 서두는 우리에게 복음서에 나오는 내용을 놀랍게 제시한다.

첫째, 다윗에게 왔던 사람들의 수가 얼마나 적었는지 보라.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1절).

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숫자인가! 이스라엘 전체의 무리와 비교한다면 한줌밖에 안 되는 무리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계실 때 그분의 형편이 이보다 나았던가?

도대체 몇 사람이나 그분의 십자가 밑에 서고, 그분의 무덤 앞에서 울고, 그분이 죽음의 빗장을 깨뜨리고 나오셨을 때 그분을 반겼던가? 도대체 몇 사람이나 그분을 따라 베다니로 가고, 그분이 승천하시는 모습을 바라보고, 다락방에 모여 그분이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렸던가?

그리고 오늘날의 형편은 어떠한가? 이 세상의 무수히 많은 사람들 중 복음을 접하기라도 한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그분의 이름을 지닌 사람들 중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이 보여 주신 모범을 따르고, 그분이 인정하시는 유일한 제자됨의 징표로써 자신의 신분을 입증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당신은 이것을 "참으로 낙심할 만한 상황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것은 믿는 자들이 예상해야 하는 상황이다. 주 예수님은 자신의 양떼를 향해 "작은 무리여"(요 12:32)라고 말씀하셨고, 생명에 이르는 좁은 길을 따르는 이가 "적다"(마 7:14)고 선언하셨다.

둘째, 다윗을 찾아왔던 이들의 특별한 상황에 다시 한 번 주목하라.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2절).

구속받은 자들이 그리스도께 도움을 구할 때 그들이 처한 상황을 이보다 적절하게 묘사하는 다른 말이 있을까? "빚진 자."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우리는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데 실패했고, 우리에게는 수 많은 죄의 흔적이 남아 있다.

"환난 당한자(핑크는 이 표현을 "고뇌에 빠진 자"(in distress)라고 읽고 있고, 이하의 내용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는 편이 쉽가-역주)."

그 누가 성령에 의해 참으로 정죄된 자의 영혼의 고뇌에 대해 말해 줄 수 있겠는가? 동일한 것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만이 우리가 하늘에 계신 무한한 위엄을 지니신 분께 도전하고, 그분의 오래 참으심을 경시하고, 그분의 자비를 거듭 모욕했던 끔찍한 죄악을 인식할 때 느끼는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슬픔에 대해 알 수 있다.

"마음이 원통한 자"(핑크는 이 표현을 "불만족한 자"(in discontent 라고 읽고 있고, 이하의 내용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는 편이 쉽다-역주).

그렇다. 이 말은 이 구절 속의 다른 말들만큼이나 정확한 말이다. 자신이 영적인 빈민임을 깨닫고 이제 자신의 죄에 대한 슬픔으로 가득 찬 자는 지금까지 그를 기쁘게 해주던 것들에 대해 불만을 갖는다. 이제 그는 그동안 그를 매혹했던 쾌락들에 대해 흥미를 잃는다. 한때 그를 매료시켰던 유쾌한 모임은 이제 그를 불쾌하게 만든다.

오, 하나님이 죄의식을 통해 후려치신 영혼에게 이 세상이 갖고 있는 공허함이란! 그렇게 하나님께 얻어맞은 자는 전에 그가 그토록 열심히 좇았던 것으로부터 혐오감을 느끼며 돌아선다. 이제 그의 마음속에는 아무것으로도 채우지 못할 가슴에 에는 듯한 공허가 존재한다.

정죄를 당한 죄인은 너무나 비참하기에, 이제 그는 자기가 죽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는 죽음이라는 생각 자체로 인해 두려워한다. 사랑하는이여, 당신은 그런 경험을 해보았는가? 아니면 이 모든 말이 당신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소리에 불과한가?

셋째, 빚진 자, 환난 당한 자, 그리고 마음이 원통한 자들만이 다윗을 찾았다. 그들이 다윗을 찾아온 유일한 자들이었다. 그들을 그에게로 이끈 것은 필요에 대한 깊은 의식과 다윗이 자기들을 구해 낼 수 있다는 소망이었다. 그것은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참으로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서 거지나 다름없고, 내세울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공덕이 될 만한 것을 절대적으로 결여하고 있다고 느끼는 자들 외에는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빚을 갚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기쁜 소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직 양심이 찔리고, 마음이 깨지고, 죄에 대해 아파하는 자들만이 다음과 같은 그분의 복된 말씀에 실제로 반응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 비참한 세상에 대한 애정을 잃어버린 자들만이 진정한 마음으로 영광의 주님을 향해 돌아선다.

넷째, 지금 우리가 숙고하고 있는 내용은 단지 그리스도의 백성들이 그분께 처음으로 나오는 것에 대한 예표일 뿐 아니라, 또한 그후에 그들이 "영문 밖으로 그에게"(히 13:13) 나아가는 것에 대한 예표이기도 하다. 아둘람 굴에 있는 다윗을 찾아갔던 자들은 사울의 왕궁과 유대교에 대해 등을 돌린 셈이었다.

그곳에는 그들을 불쌍히 여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돈 한 푼 없는 거지들에게 누가 관심을 갖겠는가? 환난을 당한 자들에게 누가 마음을 쓰겠는가?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에서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자기만족에 빠진 라오디게아 교회(부유한 금융도시로 소아시아 최대의 도시였다-역주)와는 아무런 공통점을 갖고 있지 않다.

영적으로 "환난 당한 자"가 홍수처럼 몰려오는 세속적인 사람들, 중생하지 못한 군중들, 아무런 신앙적 훈련도 받지 않은 사람들보다 어떻게 더 우월할 수 있는가? 그렇게 경건의 모양만 가진 자들에게 슬픔에 감긴 하나님의 자녀들이 보일 태도와 행동은 어떠해야 하는가?

간단하다.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그리고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편에 서서 그분과만 동행하라.

다섯째,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삼상 22:2b).

이것은 중요하고 놀라운 구절이다. 만약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로 알려지시려면, 그분은 우리에게 "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골 2:6).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통해 증거되어야 한다(요 14:15).

다윗을 찾아왔던 이들이 얼마나 이상한 무리였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다윗의 종이자 군사가 되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연계하기로 한 모든 이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나의 멍에를 매라"(마 11:29). 그런 요구에 움츠러들 것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선언하시기 때문이다.

Arthur W. Pink 다윗의 생애1 p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