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시리즈/영적인 실천 (Practical Christianity)

[영적인 실천 55] 그리스도인의 출발

En Hakkore 2024. 4. 20. 10:49

5. 하나님의 제작품(11)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죄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5,26).

우리가 이 구절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이 선포의 예언적이고 시대적인 의미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교리적인 중요성 때문이다. 여기서 자세한 주석을 할 생각은 없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 내부에서 일으키신 '은혜의 이적'의 본질적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들에게 뿌려서 성결케 하는 '맑은 물'은 요한복음 15:3과 에베소서 5:26이 명백히 밝히듯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상징이다.

자연인의 마음은 생명이 없고 무감각하여 강퍅한 '돌'과 같다. 그러나 그가 거듭날 때 그의 마음은 새로운 생명과 따스한 감정이 되살아나고, 성령의 감동을 분별할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이 된다. 거듭날 때 일어나는 변화는 피상식적이거나 국부적인 것이 아니고 본질적이고 완전한 것이다.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마 12:33).

이 일을 성취하는 농군의 방법은 로마서 11:17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돌이킨다'(be converted)는 것은 근본적인 변화, 즉 교만이 겸손으로, 자만심이 의뢰심으로 비취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머리(the Head)의 생명은 지체들에게도(His members)전잘되며, 주님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신령한 은혜는 성도들 안에서도 어느 정도 재생된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네게 올 수 없으니"(요 6:44). 그리스도에게 오는 것은 그를 주와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며, 우상과 자기 의(義)를 내던져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복속하는 것이며, 그분의 희생제사를 신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성령의 능력 아니고는 실천될 수 없다.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행 15:9; cf, 벧전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그리스도인은 두 개의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께끗하게 된' 하나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행 16:14). 타락한 인간의 마음문은 하나님께서 여실 때까지 하나님에 대하여 조개 입처럼 다물어져 있다.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너로 사환과 증인을 심으려 함이니...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행 26:16, 18).

여기서 우리는 은혜의 이적에 관한 또 다른 묘사와,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사역의도구로 삼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성령께서 권능으로 역사하셔야만 설교가 효력을 발휘하긴 해도 말씀의 선포는 중요한 위치를 점유한다.

여기서 그 이적은 우리의 이해의 눈을 뜨게 하여 복음의 영적 의미와 복음에 대한 우리의 내적 갈구를 인지하게 하는 어떤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영적 흑암에 갇혀 있던 영혼이 하나님의 기이한 빛으로 인도되어져(벧전 2:9) 그리스도야말로 자기같이 절망적인 존재에게 온전한 구주이시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동시에 "어두움의 권세"(눅 22:53)인 사단의 포로에서 구속된 영혼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것이며,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불러 일으키며 죄 사함을 확신시켜 주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네째로, 하나님의 자녀들로 그들 스스로를 손쉽게 말씀의 거울에 비춰보도록 하기 위함이다.

정직한 마음의 소유자와 속이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실제로 경험한 위대한 변화를 명백히 확신하는 일이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인정할 것이다. 비웃는 것은 아니지만 영생에 대한 사람들의 신중한 태도에는 감탄을 금할 길 없다.

단지 바보만이 의심을 하는 것 같다. 한편, 은혜의 이적을 경험한 독자라면 그 이적에 대해 의문을 품을 하등의 이유도 없을 것이다. 마치 수면에 얼굴이 반사되듯 거듭난 사람의 특성은 말씀에 기록된 묘사와 정확히 일치한다.

우리가 이미 본대로 그 묘사는 깊은 사려에 의해 다양하게 주어졌는데, 때로는 현저한 모습으로, 때로는 그렇지 않은 모습으로 주어졌다. 이것은 마치 사진사가 동일인물을 여러 각도에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은 것과 가타. 정지한 모습, 미소짓는 모습, 전면(全面) 촬영, 또 측면 촬영 등.

어떤 모습은 다른 것들보다 그를 '보다 정확하게' 보여 주는 것도 있을 것이고, 또 손쉽게 '식별토록'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모든 사진들은 결국 그 사람 자신의 모습이다.

사랑하는이여, 당신 자신 속에 성경에 기록된 것들과 일치하는 중생의 표식들이 있는지의 여부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면밀히 검토해 보라. 그러면 그 표식들 중의 '일부'만 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러나 비록 당신이 에스겔 36:26의 변화를 온전히 경험하진 못했을지라도 사도행전 16:14과 로마서 5:5의 변화는 경험했음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로마서 7:9과 같은 것을 '의식적으로 경험' 한다는 것은 어렵고, 처음엔 삭개오가 급히 나무에서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했을 때(눅 19:6) 맛본 경험과 유사한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삭개오의 급격한 회심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휫필드(Whitefield)는 장차 있을 진노에 대한 '공포'를 경험하지도 못한 그리스도인도 있을 수 있는가 하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에게 적절하게 말한 바 있다.

"밤새 해산의 수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은 이웃에게 당신이 아기를 낳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문제는 아기가 실제로 태어났는지의 여부에 있지 얼마 동안 고통이 지속되었는지에 있지는 않는 것이다!"

성경에 루디아나 삭개오가 회심 전에 율법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다는 말은 한 군데도 없지만, 그들에 대한 기록들로 미루어볼 때 그들이 실제로 회심했다는 사실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찬가지로 비록 당신 마음 속에 하나님의 율법이 기록되었는지에 대해 절대적인 확신은 없다 하더라도, 당신이 '형제를 사랑' 하는지의 여부를 가려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만일 당신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의 형상, 즉 "의(義)와 진리의 거룩함"을 따라 새롭게 창조하셨는지의 여부에 대해 고민을 한다는 사실 바로 그 자체가 당신이 자연인의 상태에 있지 않음을 입증한다.

다른 구절들에도 당신 스스로를 비추어보라. 그러면 당신 속에 중생의 표식들, 이를테면 죄를 슬퍼함, 의에의 굶주림, 하나님과의 교통을 사모함,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골방의 기도 등의 존재여부를 확인할 수 있으리라.

자아(自我)에 대한 사랑을 포기함으로 세상은 이미 매력을 상실했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 당신 눈에 최대의 목표로 비추어지는가?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중생의 독특한 표식들 중 일부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Arthur W. Pink 영적인 실천 p147